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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잍호텔 Aug 22. 2022

탁월하거나, 공감되거나




음악을 만들던 때 나는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았고 큰 재능도 없었다고 자평한다. 어쩌면 협업을 하기에 나는 많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간혹 몇 개 남아 있는 개인 작업들을 우연히 들어간 전생 같은 과거 유튜브 개정을 통해 듣고 보면 제대로 녹음한 음원들보다 더 애정이 가는 기억들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그냥 그대로 솔직하고 날것인 나를 내가 받아줬으면 또 그것들을 꾸준히 지속해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화려하고 즐거웠던 밴드 활동은 청춘과 함께 기억되어 인생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은 노래는 내 컴퓨터 하드 안에 있었을 테다.


개인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스페이스 에코 같은 빈티지 이펙터와 슈어 마이크를 구입하고, 프로그램을 익혀가기 시작한 그때에 나는 누군가 내게 “너무 좋아. 계속해”라고 해주었던 말 대신에 “못하면서 왜 해”라고 싹을 밟아 버린 그의 말에 휘둘렸었다. 그것은 마치 “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의 숱한 방해들을 이겨내지 않고, 쉽게 포기해버렸던 나의 의지력 부족, 그리고 의존적인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타인의 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다소 악의적일 수 있는 부정적인 의견에 더 마음이 흔들려 금세 파삭하고 부서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내가 계속하고자   가장  방해물은  자신이고, 그다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가장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쓰는 부정적인 말들은 나를 파괴 시킨다. 그리고 혼동이 된다. 나를 생각해주는 말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반대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준다면  피울 꽃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과거 나의  번째 남자 친구를 통해 체험했었다.

그는 다정하기도 했지만 나를 정말 멋지게 봐주었다. 내가 입는 옷,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한 지지가 강렬해서 떠받들어 준다는 느낌까지 받았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루었었다. 그게 바로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힘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오래전 어느 글에서 반에서 수수한 여자아이를 골라서 두세 명이 지속적으로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예쁜 부분을 칭찬해 주면 몰라 보게 예뻐진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실제로 그런 실험 자체가 존재하며 그런 스토리의 유튜브도 봤던 기억이다.

사람은 그렇게 타인에게 비친 모습으로 변해간다. 트집을 잡고, 단점을 지적하면 더 완벽해질 것 같지만 그건 절대적인 오해이다. 폭력적인 언어 아래에 자라난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얘기해주면 갖고 있던 단점까지 사라져 버리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수많은 경우를 거치며 느낀 점이다. 사랑스러움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고 그 가치를 못 느껴 본 사람들이 언어는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부정적인 언어들에 몰입하지도 휘둘리지도 않으려 한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부족한 점을 아니, 개선하고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방향이나 흐름은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들고 개척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그 누가 간섭하거나 방해하거나 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언과 방해의 아슬아슬한 중간지점으로 누군가 나를 교묘히 설득하려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보라. 행복한지, 불행한지. 행복한 사람은 행복으로 나를 이끌고, 불행한 사람을 불행으로 나를 끌어내린다. 그 행복이 진짜 행복인지도 지긋이 찬찬히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나는 다시 창조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세상에 다시 돌아오고 나니 오래전 기억들이 나를 불러 세운다. 내가 왜 거기에서 멈췄었나. 나는 왜 더 계속하지 못했을까.

환경적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피치 못 할 사정도 없었다. 모든 여건이 지금 돌이켜 보면 충분했다. 오로지 문제는 나 하나였다. 정확히는 부정적인 언어와 부정적인 피드백에 취약한 나였었다. 그 부정적인 의견들을 다 지우고 나니 나만 여기 오롯이 남아 있다.


그러면서 하나씩 조각들을 이어 붙여 갈길을 만들어 간다.

나는 어떤 그림과 글을 창조해 낼까. 어떤 것들을 만들어 나가야 할까. 차분히 떠올려 갈 길 앞에 써 붙인다. ‘탁월하거나, 공감되거나’ 탁월함이란 끝없는 지속성과 자기 객관화를 통한 수정 능력, 개선 능력을 발휘하면 선물처럼 간간히 나를 찾아 와주는 것일 테고 공감이란 것은 내가 남의 이야기를, 마음을 정말 ,마음을 다해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가능할 것이다.

나만의 세상을 굳건히 세워 그 안의 탁월함을 만들고 그 속으로 타인을 초대해 매료시킬 수 도 있고, 끊임없이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공감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마흔두 살, 나는 이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 자신의 의존성을 탓하지도 않고, 이 두 가지를 쫓아 걸어 나가고 싶다.


탁월하거나, 공감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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