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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는 차가 없어서

by midnightsalon

1등급을 받기가 어려운 것처럼, 9등급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위 4%가 되려면 하위 5%도, 6%도 피해 가야 한다. (하위권 경쟁의 치열함은 고등학생 과외를 하며 알게 되었다.) 운전 필기시험은 정규분포 안에만 들면 되는 난이도이니, 학원 셔틀 봉고차를 타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신호체계는 이무진의 <신호등> 가사 수준까지만 이해하고 있는 나조차도 무난하게 합격하는 게 대한민국 운전면허 필기시험이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모의고사 잘 보는 게 쉬웠던 것처럼.


연수받기 얼마 전에 고등학교 친구의 차를(그 애의 아버님 차였다) 타며 대화를 나눴었다. 곧 나도 운전 연수받는데, 운전하는 게 무섭다, 못할 것 같다라고 했더니 친구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초졸도 하는 게 운전이야.”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건 초졸도 한다. 그 문장에는 학벌 중독자를 움직이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나는 (외고) 고졸로서 운전 근자감을 부적처럼 지니고 운전석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몇 분만에 나는 깨달았다. 초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꼭 고졸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상상 속의 자동차 주행에서 핸들은 가볍게 돌리면 차가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했고, 엑셀은 꾹 눌러야 차가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의 핸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돌려야 했고, 엑셀은 조금만 건드려도 차가 덜컥 튀어나갔다. 사무적으로 앉아 있던 운전 강사가 옆자리에서 보조브레이크를 조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차가 튀어나가던 순간, 이 차를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이 구체적으로 온몸을 짓눌렀다. 차는 이미 도로에 진입해 있었고, 학원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는 무를 수가 없는 길이었다. 음식을 올린 카트를 끌고 심사위원에게 걸어가는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처럼. 수능 시험이 시작되면 답안지를 제출해야만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끝이 나는 것처럼.


아무리 긴장되어도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도, 통제력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패닉에 빠진 나는 사이드미러도 확인하지 못하고 전방만 주시했다. 핸들 잡은 손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좌회전 차선에 가까스로 진입하고 나서는 핸들을 충분히 꺾지 않아서 강사가 큰 소리로 혼을 내며 핸들을 돌려주었다. 여러 차가 빵빵대며 지나간 끝에야 가까스로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자동차와 전혀 친해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아빠가 보고 싶었다. 내가 삼수를 하는 동안 아빠 사업도 같이 내리막을 걸었다. 기름 먹는 하마였던 다이너스티 차는 중고로 팔았고, 아빠는 지방으로 가서 도통 소식을 몰랐다. 아빠와 장녀의 연이은 실패에 드러누우신 엄마는 20년 장롱면허였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내 운전 연습을 도와줄 수 없었다. 면허를 딴 친구들은 가족 차로 연습하고 아빠 엄마가 도와줬다고, 그래도 역시 가족한테는 운전 배우는 게 아니라고 충고했지만, 내겐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 가족의 인생이 정규분포의 9등급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운전대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학원에서 제공하는 몇 번의 짧은 주행 연습뿐이었다. 연수를 추가하자면 돈이 더 들었다. 이 상태로 과연 도로에 나갈 수 있을까? 면허를 따야 한다는 압박감과 연습 부족에서 오는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운전대 앞에서는 끝까지 내가 운전자라는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망할 것이 분명한 시험이라도 도중에 시험장을 박차고 나와서는 안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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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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