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올해 17살이 된 노견이 산다.
이 강아지는 한 살 무렵 학대를 받아 나에게 오게 된 사연이 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 구체적인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간식을 줄 때 봉지 소리가 나면 뛰어오는 보통 강아지들과 달리 봉지 소리만 나면 꼬리를 내리고 숨을 곳을 찾는 걸 보며 봉지에 트라우마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고작해야 숨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중년 남자를 유독 싫어하는 걸로 보아 아마 학대의 주체는 남자였을 것이다. 상대방과 살 때도 우리 집 강아지는 늘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그래서 우리 강아지는 나와 사람아이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끝내 곁을 주지 않은 채 호불호가 확실한 삶을 살았다.
열세 살이 되던 해, 강아지의 귀가 처음 멀었다. 그때는 그저 '강년기'가 와서 말을 안 듣나 보다 오해했다.
하지만 현관 벨소리에 누구보다 예민하던 강아지가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 걸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이 아이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열네 살부터는 눈마저 멀기 시작했다. 점점 탁해지는 동공을 보며 일찍 눈치챌 수 있었다. 두 눈 다 빛을 잃었을 때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리도 빛도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그 불안과 염려에 내가 막막해져 며칠 밤을 지새웠다. 어릴 적 맺힌 응어리도 극복하지 못한 채 캄캄한 어둠에 갇힌 딸 같은 강아지가 가여워 나는 한없이 울었다.
하지만 나의 작은 강아지는 불행 앞에 주저앉지 않았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집 안의 길을 다시 익히기 시작했다.
불행 앞에 서면 침대에 누워 한참을 곱씹고 한숨만 내쉬는 나와 달리, 우리 강아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쿵쿵 부딪히며 스스로 길을 터득해 나갔다. 나는 그 씩씩한 뒷모습 덕에 깨달았다. 불행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상처받을지언정 깨지고 부딪히며 터득해 나아가는 필사적인 용기라는 것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불행은 강아지를 갉아먹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눈과 귀가 멀어지자 평생을 괴롭히던 봉지 소리도, 낯선 남자의 위협적인 형체도 더는 아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다. 공포의 근원이 차단되자 우리 집 강아지는 비로소 고요해졌다. 지금은 세상모르게, 세상을 다 가진 듯 코를 골며 잔다.
이제 우리 강아지는 뒷다리를 절룩인다.
하지만 간식을 향한 열정만큼은 17년 전 그대로다. 다행히 후각은 미세하게 살아있어 어떻게든 다리를 끌며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그 기특한 발걸음과 매일 불행에 움츠러들지 않고 온몸이 부서져라 나아가는 모습이 참 멋지고 대견하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는 탁탁탁, 찹찹찹, 쿵쿵쿵 소리가 여러 번 들려온다.
나는 그 소리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불행을 이겨내고 있는 증거처럼 들린다.
언젠가 그 소리가 사라지더라도, 나는 네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내 앞의 불행에 기꺼이 부딪혀 볼 용기를 잃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