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by 한밤

나는 불안을 잘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반복된 루틴대로 움직이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규칙이 주는 안정감에 안도했다.

그렇다고 일탈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 일탈은 일상 속 소소한 탈출이었다.

간혹 늘 먹던 음식 대신 생소한 음식을 시도해 보거나, 특히 스페인 음식 감바스가 참 맛있었다.

한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다시 써보는 것,

새로운 산책길을 걷거나,

색다른 장르의 책이나 영화를 선택하기 같은 것들.

그 작은 일탈들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데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지극히 사적인 삶의 틀은 예고 없이 무너졌다.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산산조각 났다.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렸고, 나는 안정된 가정에서 밀려났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엮어 온 삶은 쉽고 허망하게 끊어졌다.


우리는 안정된 일상을 지루해한다.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는 위험한 자극과 일탈을 좇기도 한다.

아름답고 소중한 걸 잃어봐야 그때 잃은 게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는다.

일탈이 범위 밖으로 넘어가는 순간 스스로의 색깔과 가치, 세계를 잃어버리는 불행을 초래한다.

나 역시 그런 불행 속에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의 경로를 이탈했다.

처음에는 분노했고, 우울했고, 밤이면 불면에 시달렸다.

늘 해오던 루틴대로 하루를 살아갈 수 없게 된 건 참으로 슬프고 암담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흘릴 눈물이 메말랐을 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왜 나는 늘 내 꿈을 미뤄둔 채 누구의 아내로, 엄마로, 조력자로만 살아왔을까?
왜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배경처럼만 머물렀을까?

예전의 글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온통 아이와 상대방, 상대방 가족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그 안에서 지워져 있었고, 행복이라 믿었던 기록조차 어딘가 조잡하고 억지스러웠다.
그 삶이 미련하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고유의 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선택해 왔던 삶이었다.

씁쓸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나이도 많고, 스펙도 없고, 환경도 안 되잖아’ 같은 핑계들로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로 가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게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궤도 밖으로 벗어난 이상 누군가에겐 이상해 보일지라도, 어떤 기준에는 맞지 않더라도

내 안의 분명한 빛깔을 겁내지 않고 꺼내 보이고 싶어졌다.

나는 이제 모험가처럼 예측 불허의 삶을 살아가며 틀 밖의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불행은 강제 일탈을 동반한다. 원하지 않아도, 선택의 여지없이.

그때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꿈만 꾸고 내놓지 못했던,

말하기도 부끄러워 속으로만 삼켰던 말들을 마침내 꺼내는 계기가 된다.
어쩌면 불행은 다르게 살아보라는 또 다른 세상의 초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이상 가치도 없는 상대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화내느라, 우느라, 돌아보느라 주저앉았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초대에 당당히 응해보자.
그 시간은 당신만의 찬란하고도 고유한 색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 여정 속에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조금 더 일찍 도전하지 못한 날들을 후회하지만

그 늦음마저도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드는 문이 되어주었다.

늦지 않았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이 강제된 일탈은 나를 실패 앞에서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마음은

글을 쓰는 내게 마법 같은 자유를 주었다.


설령 누군가에게는 외면당할 글일지라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옳게 읽어주는 이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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