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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Jan 19. 2023

남을 이롭게 한 일

[나의 사람들] 싱가포르로 떠난 청년

20대 후반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나름 조언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일을 해 왔다. 나의 커리어는 "직업상담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직업을 찾아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일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대했다. 그들이 원하는 꿈을 찾아주려고 애쓰기보다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들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다 만족스러웠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종종 사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따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매달 월급을 받았으므로 그저 맡은 일을 했을 뿐 그 이상이 아닌 건 분명하다.


해외 취업은 때론 어떤 사람에게는 취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육군 장교, 중위로 전역을 코앞에 둔 한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해외로 취업을 하고 싶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상담신청서 작성을 안내하고 조금 시간을 둔 뒤에 다시 마주 앉았다. 가장 가고 싶은 나라는 미국이라고 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안정감과, 장교로서의 지위도 다 포기하고 왜 낯선 타국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물어봤다. 한국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청년의 말투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보통 첫 번째 상담에서는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더욱이 지원자가 자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청년은 서슴없이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홀로 자기를 키웠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더 이상 한국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혼자 살고 싶다고 했다. 처음부터 혼자 일어서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냥 장교생활 계속하시라고, 해외에 나간다고 완전히 다른 삶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디에도 환상은 없으며 또 다른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하려고 했었다.


사연을 조금 더 듣고 해외 취업을 목표로 하는 국가 정하는 것부터 상담을 진행했다. 일단 제일가고 싶은 나라가 미국이라고 했으니 미국으로 취업해 출국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가장 가고 싶은 나라를 버려두고 현실만 고려해서 취업을 준비했을 때 미련은 두고두고 남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장 가고 싶은 나라 미국과 내가 추천하는 나라 싱가포르 두 곳을 동시에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 청년은 비자문제로 결국 미국에 가지 못했다. 비자심사에서 거절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싱가포르에서 원하는 회사에 합격게 되면서 정식 취업비자를 받아 출국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출국한 후 약 3개월 까지 1주에서 2주 간격으로 안부를 확인하며 사후관리까지 하는 것 까지가 나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 청년은 내가 먼저 안부를 묻기 전에 자발적으로 연락을 해 왔다. 덕분에 너무 잘 지내고 있으며 싱가포르라는 나라도 너무 좋다고. 또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에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정말 도움을 주는 일을 했구나!'하는 뿌듯함은 결코  아니었다. 해외 취업을 위해 한국에서 현지의 회사를 알아보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씩 해 나갈 때도 들지 않았던 걱정이 갑자기 밀려왔던 것 같다. 그 청년에게 묻고 싶었다. 원하던 대로 한국을 떠나 살게 되니 정말 좋은지... 싱가포르가 좋은 건지, 한국을 떠나서 좋은 건지. 그렇지만 묻지 않았다. 그곳 생활이 만족스럽다는 청년의 말을 그대로 믿기로 했다.


이제 10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다. 그 청년은 아직도 싱가포르에서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었으니까. 지금은 어쩌면 싱가포르 시민권을 받아 국적도 싱가포르로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시 모르겠다.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나라에 가 있을지. 한국에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사람의 일은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는 않으니까.


내가 그 청년에게 이로운 일을 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아픔을 주는 일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남에게 했던 이로운 일이라며 이 이야기를 쓰는 건, 스스로 그 일이 이로운 일이었다고 믿고 싶어서인 것 같다. 어떤 구체적인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한 때에 적당히 천국을 찾아간 것이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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