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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Jan 20. 2023

나는 문제아가 아니라고요 (1)

[나의 사람들] **대학 호텔경영학과 권예*

시말서 사건 이후, 나의 회사생활은 꽤 평화로운 듯했다. 출근해서 별 탈 없이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는데, 그게 왜인지 폭풍전야 같아서 퇴근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도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위 상사가 외근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서도 그렇고, 퇴근시간은 6시이지만 7시에는 가줘야 마음이 편했다. 이제는 이런 문화가 많이 없어졌고 나 역시 사회 물을 좀 먹은 후로는 내 할 일만 다 하면 알아서 퇴근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시말서가 아무래도 나를 좀 쪼그라들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 정도 뭉갰으면 됐어. 이제 집에 가야지 하고 짐을 챙기는데 외근 나갔던 과장님이 돌아왔다. 아니 왜 7시에 회사로 복귀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나 오자마자 나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화를 냈다.

"이거 지원자 모집 어떻게 됐어??"

"그건 *준 씨한테 확인을 해 보셔야..."

'그건 영업팀 일이고 나는 수속담당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싱가포르 모집 담당은 *준씨하고 과장님 담당이었는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나보고 모집해 오라는 거야??"

갑자기 버럭 하더니 서류 몇 장을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의자에 더 깊숙이 기대 누워 곁눈질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서류를 던지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니...... 서류를 던지길 내심 바랬던 건 아닐까 싶다. 이 회사를 포기할 핑계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 명단에 오늘 중으로 지원서 다 보내!"

**대학 호텔경영학과와 호텔외식조리학과 학생들 스무 명이었다.

아... 눈물은 왜 시도 때도 없이 차오르는가. 억울하고 화나는데 왜 눈물이 차오르는가. 하고 싶은 말을 눌러 담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지난번 시말서 일로 내가 회사에 엔간히 시달렸다는 걸 아는 다른 팀 직원이 어느새 화장실로 따라 들어왔다.

"언니, 울어??"

"아... 시발. 내가 진짜 이 회사 오래오래 다니면서 과장 달고 부장 단다. 그래서 저 인간 한번 밟아주고 말 거야. 너도 어디 갈 생각 말고 옆에서 꼭 켜봐라."

울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프로그램 지원자는 대표님이 직접 모집해 왔던 것이다.

'대표님한테 깨지고 와서 나한테 화풀이한 거구만.' 하고 생각하고 넘겼다. 어쨌든 이유를 알고 나니 응어리가 좀 풀렸다. 실제로 내가 근속기간 최장기록을 세우고 퇴사 했다. 과장으로 승진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대학 호텔경영 및 외식조리 학과 학생들과의 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그러면 안 되지만, 지원자들의 출신 대학을 보면 이번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그려진다. 솔직히 나는 이름도 처음 듣는 대학이었다.

지원자들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일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관건이기 때문에 이런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 직업병인지도 모른다.


싱가포르 어학연수 및 호텔 취업 프로그램. 싱가포르에서 약 3개월간 어학 및 호텔취업을 위한 실무 교육을 받고, 싱가포르에 있는 호텔에 취업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대학의 학생들은 마지막 학기를 어학 및 호텔취업을 위한 실무 교육을 받는 것으로 대체하고 취업을 목표로 출국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 일정에 맞춰 비자 발급을 위한 행정처리를 진행하고, 출국 전에 3회에 걸쳐 교육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내 예상대로였다.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해외에 처음 나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학업의 연장 그리고 취업을 위한 준비로 싱가포르에 간다는 생각보다 몇 달 즐겁게 놀러 간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학생들의 해이해진 모습을 볼 때마다 사전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참가자들과 달리 이렇게 한 대학에서 단체로 진행하는 경우 관리가 편한 점도 있지만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크다. 이 학생들이 현지에 가서 잘 적응하고 별 탈 없이 연수기간 마치고 또 취업률까지 좋다면 그다음 해에도 우리 회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명 모두 비자 발급이 무사히 완료되고,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출국 전 한국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 공항 이용 방법, 짐 싸는 방법, 현지 생활 노하우 등 다 큰 성인들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세세한 안내를 해 준다. 학생들에게 정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사실상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술책도 없지 않아 있다. 설명회나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할 때마다 '서약서'를 받는다. 회사에서 안내한 사항을 직접 참가하여 들었으며 이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불찰로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이 가장 싫은 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준비한 오리엔테이션 내용을 모두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프로그램에 별 관심도 없어 보였던 학생들이라 역시나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이도 없었다. 그때 저 뒤에서 여학생이 손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클럽 가도 돼요?"


헐......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대하면서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네 돼요. 그러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만큼, 기숙사 이용 규정을 지켜주시고 학교나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기숙사 규정은 오티자료에 안내해 드렸으니 꼭 한번 더 숙지해 주세요."

내가 된다고 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오리엔테이션을 지켜보고 있던 과장님이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너 어쩔려고 그렇게 말하냐...'는 듯.

그 여학생이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외박하는 건요? 외박해도 돼요?"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는동안 지루하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던 대부분의 학생들 눈이 초롱초롱해 졌다.

"여러분은 성인이니까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시면 됩니다. 다만 외박을 하게 될 경우 사전에 기숙사에 미리 안내하시고, 외박할 일이 생기거나, 주말을 이용해서 말레이시아를 여행을 가게 되면 사전에 꼭 부모님, 그리고 저에게 알려주세요. 여러분이 현지생활 근황을 잘 공유해 주셔야 문제가 생겼을 때 저희가 즉각적으로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노파심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이 프로그램은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단체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기회가 다음 후배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이 프로그램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어요. 부디 나만 생각하지 말고 책임감 있게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약간 동문서답 같은 내 말을 그 학생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원하는 대답을 속 시원하게 듣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만 나 역시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나에겐 그 학생의 권리를 막을 권리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 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서울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하며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긴장하고 노력해도 바다건너에 있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무슨 수로 다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사건 사고는 현지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인천 공항에 도착했는데 여권을 안 가져왔다는 둥, 오리엔테이션 때 열심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비자가 뭐냐는 둥, 단체 출국을 하는데 늦잠을 자서 이제 일어났다는 둥, 탑승수속 하고 들어갔는데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둥 오만가지 일들이 다 일어난다. 그런데 내가 이 학생들을 어떻게 성인으로 생각하고 속 편하게 "클럽 가고 싶으면 가야죠! 외박이요? 그것도 여러분 자유입니다!"라고 대답할 수가 있겠는가. 나 역시 사회생활 내공이 부족한 갓 서른 된 직장인에 불과했는데 누가 누구의 안녕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와 클럽에 가도 되냐고, 외박해도 되냐고 질문 했던 여학생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노란색으로 셀을 구분 한뒤 메모를 적어놨다.

"관리대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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