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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Jan 25. 2023

 시어머니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3

[나의 사람들] 시어머니

시간이 지나고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서로 이해하는 것이 생깁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시부모님께서 아기를 돌봐주시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남편은 육군 장교생활을 그만두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공군에 재 입대하게 되었고, 몇 달씩 훈련을 가야 했다. 나는 아기의 첫 돌 무렵에 복직했다. 하는 수 없이 시댁 근처로 이사를 가야 했고 시부모님은 흔쾌히 손주를 돌봐주겠노라 하셨다.


우리가 이사한 집은, 회사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고 시댁까지는 걸어서 5분~10분 거리였다. 나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시부모님이 아이를 데리러 오시고 데려다주셨으며 거의 나의 스케줄에 맞춰 주셨다. 아이는 시댁에서 가장 가까운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출퇴근 거리가 만만치 않다 보니 오가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고 집에 와서는 아이를 돌보며 회사생활을 한다는 것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기도 했다. 남편도 없이 워킹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부모님의 도움 덕분이었다. 너무도 감사했던 시간들이었다.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다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그럼에도 견디기 힘든 순간들은 있었다. 아이가 아플 때였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아픈 아이를 뒤로 하고 출근하는 일은 모래주머니를 양 발목에 무겁게 매달고 질질 끌고 가는 심정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무리 잘 돌봐주신다고 해도 아픈 아이를 생각하면 아이 옆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든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 무렵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팠고, 감기는 예삿일이었다. 특히 중이염이 자주 와서 40도를 웃도는 고열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 괜찮아졌다 싶으면 2주가 멀다 하고 금세 또 열이 났다. 주말에도 문 여는 소아과를 찾아 병원 다니기 바빴다. 나 역시 초보 엄마인지라 밤새 열이 안 떨어지면 아이가 어찌 되는 건 아닌가, 무서웠다. 해도 다 뜨지 않은 새벽에 택시를 타고 응급실을 간 적도 있었다. 게다가 수족구, 독감 등등 유행하는 전염병은 다 걸렸었다. 우리 아기의 두 살은 엄마도 없이 병치레만 하다 보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아이가 아플 때 보이는 아버님의 태도였다.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가실 때 아이가 아프면 아버님의 표정에서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내 아이가 아프면 엄마마음이 가장 아프다는 걸 모르실까, 섭섭한 마음을 넘어 서럽기까지 했었다. 그렇지만 아버님은 직접적으로는 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주말에는 좀처럼 연락을 안 하시는 분들인데 그날은 무슨 이유로 시댁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아버님은 내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남편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애써 나를 위로하시려는 듯 "애들 다 아프면서 큰다~ 걱정 마라, 아프고 나면 애들 재주도 하나씩 늘고 그런다. 다 크는 과정이다."라고 하셨다. 주변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님이 문자 메시지까지 보내주셨다.


"남자들은 애들 아프면 다 여자 탓이라고 생각한다. 아비 어릴 때도 퇴근해서 집에 와 누구라도 아프면 나한테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아버지가 뭐라 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어라"


경상도 분이라 문자 그대로 보면 무뚝뚝하기 그지없지만 내 마음을 읽고 걱정해 주시는 게 느껴졌다. 눈물이 차올라 괜히 아픈 아기를 한 번 더 꼭 안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날 두 분이 크게 싸우셨다고 한다. 내가 떠난 후 아버님은 어머님에게 "애들 아픈 게 어른잘못이지! 아프면서 큰다는 이상한 말을 하노!" 라며 화를 내셨다고 했다. 아버님을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생각해서 괜히 그런 말씀은 하셔서 두 분이 싸우셨다니, 괜히 내가 죄지은 느낌이었다.

그제야, 출산하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때가 생각났다. 뜬금없이 '손주가 아무리 예뻐도 절대 똥기저귀 안 치운다.'라고 하셨던 메시지를 보고 심장이 요동쳤던 기억. 머리에서 징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어머님은 갓난아기의 손주를 보시고 그 옛날 삼 남매를 키우면서 아버님과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셨던 게 아닐까. 게다가 내 남편은 신장병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막내아들이었다. 행여 그 시절 아버님과의 불화를 반복하게 될까 봐 먼저 선을 긋듯 말씀하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추측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오죽하면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어머님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혹여나 며느리도 같은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나름 방패역할도 해주셨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엄마라는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되니, 시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왔다. 이런 일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이해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렇게 가족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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