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버지(애티커스 피치)의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지만, 오늘은 책 속 문장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골랐다.
내가 그동안 마음속에 꼭꼭 담아 온 이야기를 이참에 좀 해야겠다.
남편과 나는 4살 차이다. 내가 4살, 빠른 생을 적용한다면 5살 많은 셈이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러니까 연애 때부터 시어머니가 나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애시절 남편의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남편의 수화기 너머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할머니랑 빨리 헤어져!"
남편은 전화기를 놓치듯 내팽개치고 내 귀를 막았다. 기가 막혔지만, 난 그때 시어머니의 말보다 남편의 행동에 집중했던 것 같다. 나에게서 해로운 말을 차단해 주려고 한 순발력. 물론 다 들어버리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남편과 결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할머니라고 표현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이 남자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과정에서 우연히 시어머니의 문자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남편이 자릴 비운 사이 남편의 핸드폰 창에 시어머니의 문자 메시지가 크게 떴다. 메시지가 크게 뜰 리가 있겠는가, 다만 내 눈에 그 메시지는 돋보기를 갖다 댄 듯 확대돼서 또렷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엄마도 명문대 며느리 보고 싶어."
그야말로 "헐..."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머님한테 내가 탐탁지 않았던 이유는 나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동적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는 당신의 아들은 명문대를 나왔나? 이 집안에 명문대 출신자가 있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는데, 시어머니의 보상심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머님은 결혼해서 남편의 형 가족들을 돌보았다. (여러 사연이 길지만 일단 생략하겠다.) 그 형들의 자녀들은 죄다 S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의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 집안의 분위기가 어머님을 그렇게 만들었고 어머님조차 은연중에 그걸 받아들이신 듯했다. 그런 시어머니가 좀 측은했다. 아무튼 결혼은 진행됐다. 시아버지가 나를 예뻐하셨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속마음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좋은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어머니도 속으론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건 겉으로는 나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현시점에서는 이런 속 다르고 겉 다른 태도도 싫은 이유 중 하나이긴 하다.) 결혼생활 초반 나는 남편에게 남편을 비롯한 남편의 삼 형제가 얼마나 잘 성장해 왔고 훌륭한지를 내내 강조했다. 시어머니의 그 문자를 본 후로 남편의 학벌 자격지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무심코 하는 말들에는 자기네 삼 형제는 실패했다는 식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남편도 아주버님도 굳이 필요도 없는 (물론 내 기준이지만) 대학원 학위를 왜 땄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결혼할 때 남편은 육군 대위였다. 우리는 예도를 받으며 퇴장했다. 이 점에서 시부모님은 알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지는 듯했다. 그러면서 사회자의 시답지 않은 이벤트를 일절 못하게 하셨다. 품위를 깎아 먹는다나 뭐라나. 관종인 나는 좀 아쉬웠지만, 그냥 시부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부모님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는 마음으로. 장교인 막내아들이 품위 있게 결혼식을 치르는 게 자신들의 품위를 보여주시는 거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결혼 후 남편은 육군 장교를 그만두었다. 결혼 전부터 자기는 군인이 싫다고 했던 사람이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은 그렇지 못했다. 결혼하고 1년 후, 남편과 시아버지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 시기 남편은 나를 꽤 많이 의지했다. 남편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나뿐이었다. 남편은 결국 고민 끝에 다시 직업군인을 선택해 공군으로 재입대했다. 이번에는 부사관이었다. 장교 생활할 때 보다 일도 확실히 줄고, 그로 인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나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이도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많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하루하루 기특하게 성장했다. 남편은 그런 아들을 보며 모든 삶의 고통을 아들로 치유하는 듯했다. 사실 남편은 그 무렵 다시 시작한 직업군인 생활을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바로 계급의 문제였다. 장교 생활하다가 부사관으로 근무하려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남편이 그런 서열관계에서 받는 자존심 문제 따위는 가뿐하게 넘겨버릴 거라 믿었고 그러길 바랐다. 그때는 시댁에 손주가 우리 아이 하나일 때라,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아이의 기특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시댁 단독방에 올렸다. 어느 날, 시어머니의 말에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장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더 이상 자기 아들이 장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신 걸까, 아니면 아들이 장교였던 시절에 머물러 계신 걸까. 저 말 한마디에 남편은 또 현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지난날 그 신분 때문에 아들이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모르시는 게 답답했다.
며칠 전,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시던 중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축하한다고 직접 전화를 하신 것이다. 전화 통화가 끝나고 어떤 대화 끝에 시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장교라고 믿고 딸 시집보내셨을 텐데, 할 말이 없다."
이런 비슷한 말을 시어머니는 전에도 몇 번 하셨던 적이 있다. 우리 엄마한테도 하시고 나한테도 하시며 사부인에게 면목이 없다는 듯이.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 우리 집에서는 아이 아빠가 장교라서 결혼시킨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남편이 장교든 아니든 상관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그 말을 삼켰다. 시어머니의 자부심에 괜한 스크래치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별로 탐탁지 않은 며느리인 내가 굳이.
우리 시댁은 수도권에서 조금 벗어난 경기도에 있다. 원래는 서울 강북에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를 했고 그다음엔 경기도 과천을 거쳐 현재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아버님 직장도 멀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됐는지 궁금해서 남편에게 물었었다. 이사의 시작은 아버님의 직장 때문에, 그다음은 아주버님의 교육문제였다. 서울에 있는 과학고나 외고를 갈 실력은 안되고 특목고는 보내고 싶고, 그래서 과천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천에 집을 사려고 했는데 과천 집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님이 그 근처 다른 도시를 보셨는데 어머님이 "거긴 못 사는 사람들 사는 동네다"라고 하시며 한사코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무렵 남편은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 엄마와 아빠가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곳에 산 지 오래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긴 서울 수도권에서 망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오는 동네라고 그 지역을 폄하하는 말을 아직도 하신다. 오리지널 강원디언인 나로서는 무슨 말인지 부동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말만은 머릿속에 콱 박혀버렸다.
시어머니의 삶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분의 살아오신 시간들을 헤아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러려고 노력도 해 봤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분하고도 가족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좋아졌던 감정의 두 배 이상으로 다시 싫어졌다. 여전히, 싫다.
내가 시어머니를 싫어하는 이유라고 하면서 쓴 글이지만 그 이유를 적은 건 아니다. 단지 책의 문장에 관련된 몇 가지만 적었을 뿐이다.
내가 시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자기 체면을 높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니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다만 정말 싫은 건, 종종 내가 시어머니의 체면을 구긴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