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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Apr 04. 2023

어른이 아이를 지키는 걸까요, 아이가 어른을 지킬까요

고전 질문 독서 [앵무새 죽이기]

이 낯선 사람들 무리에 둘러싸인 채 아빠는 젬 오빠를 설득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빠가 위협하고, 부탁하고, 마침내 <젬, 제발 애들을 데리고 가> 하고 말씀하셔도, 오빠는 <전 안 가요> 하고 완강하게 버틸 뿐이었습니다.

나는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일단 아빠가 오빠를 집으로 보내고 난 뒤 닥쳐올 일을 생각하니 오빠는 오빠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켓몬빵 열풍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지난해 초여름쯤으로 기억한다.

일요일 아침 교회 갈 준비를 미리 다 마치고 조금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큰 아이가 "포켓몬 빵 먹고 싶다!" 하고 외쳤다. 오전엔 늘 게으름을 피우던 아빠가 어쩐 일로 사러 가보자며 부지런을 떨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동네 편의점에 포켓몬 빵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평균 10시에 물류차가 온다는 걸 알아놓고, 몇 주 전 토요일 오전에 아이들과 포켓몬 빵 사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니 내가 더 기대에 부풀어서 지금 나가면 포켓몬빵 두 개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남편과 아들은 희망을 가득 안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라 둘째 딸의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나가봤다. 뭔가 이상한 공기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남편과 아이는 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 앞에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두 부자가 말없이 조용히. 그리고 다른 한쪽의 테이블에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남편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세 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남편과 할아버지는 서로를 매섭게 응시하고 있었고, 그 옆에 아이는 긴장한 채로 조용히 앉아 멀뚱 거리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아이에게 다정하게 다가갔다. 나의 등장으로 쉽게 깨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보니, 물류차가 평소보다 늦었고 그래도 10-20분 안으로 올 거라고 해서 다른 먹을 것을 사서 먹으며 편의점 앞에서 포켓몬 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는 걸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나에겐 익숙한 표정이었다. 부드럽게 회유해서 포켓몬 빵을 포기하고 집에 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그런 나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큰 사람이라 조금만 힘주어 말해도 동네가 울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


"담배 피우지 마시라고요!! 애 있는 거 안 보여요??!!"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웃음에 조금 더 가까웠다.


"아니, 그래서 내가 한 대만 피고 껐잖아. 왜 그렇게 노려봐??"


웃으면서 시작한 말이지만 말 끝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뭐라고요?? 껐다고요? 제가 담배 꺼달라고 했는데 계속 피셨잖아요!! 여기 흡연장소 아니에요! 애가 있는데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 애 안 보여요?!!!"

"왜 자꾸 소리를 질러?!!"

"왜 반말하세요!?"


남편은 길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와 둘이 길을 걷다가도 흡연자를 발견하면 내 팔이 아파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나를 반대쪽으로 잡아당긴다. 흡연자들에 대한 분노가 내 팔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담배연기보다 남편의 행동이 더 기분 나쁘게 느껴졌었다.


흡연 문제에서 반말 문제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내동댕이 처졌다.


"야 이 새끼야! 너 몇 살이야?! 시발, 이 새끼가 아까부터 어른을 노려보고 보자 보자 하니까, 그만해 새끼야!!"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내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왜 욕을 하세요?! 애들 듣잖아요!! 욕하지 마세요!!"


아이들 앞에서 아빠를 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둘에게는 이미 나는 안 중에도 없었다. 내 목만 아팠다. 할아버지는 웃통을 벗어서 집어던지고 남편 쪽으로 가까이 갔다. 꽤 노쇠한 몸이었지만 할아버지 등에 큰 용 문신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아이들이 걱정됐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너는 애비도 없냐?? 어디서 어른한테 큰소리야? 못 참아주겠네 시발!! 야 한대 쳐봐!!"


남편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으로 응수했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가슴을 남편 쪽으로 밀었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스테인리스로 된 재떨이를 잡아 올렸다. 그 재떨이를 보고 알아차렸다. 편의점 앞이 금연장소이긴 하지만 공공연하게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던 곳이라는 증거물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늘 담배를 피우던 곳에서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남편이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야! 경찰 불러!! 신고해"


나는 남편에게 진정하라며 그냥 집에 가자고 애원했다. 애들 봐서라도 제발 그냥 가자고. 제발을 몇 번을 말해도 남편은 듣지 않았다. 나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해 놓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접 112에 전화했다.


"여기 00동 00 아파트 편의점 앞인데요. 싸움이 났어요. 와주세요"


남편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듯했다. 그렇게 직접 경찰을 불러 놓지 않았으면 정말 그 할아버지를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도 나와서 남편과 할아버지를 말리고 있었다. 딸아이는 놀래서 아빠랑 할아버지랑 왜 그러느냐고 계속 묻고 아들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몇 분도 안 돼서 경찰차가 왔고, 경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내려 남편과 할아버지 쪽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고 있던 큰 아이가 감정을 터트리듯 갑자기 울부짖었다.


"아빠는 잘못 없어!!! 아빠는 죄 없어!!!"


남편은 나더러 애들 데리고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걱정이 됐었나 보다. 그러나 큰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닥에 말뚝이라도 박아 놓은 듯 꿈적도 않고 같은 말만 계속하면서 울었다.


"아빠는 죄 없어!! 내가 다 봤어!"


아빠를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나는 이미 아이들이 최악의 상황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까지 봐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사실 아이들보다 더 불안한 건 남편이었다. 저 사람을 내가 직접 데리고 들어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반복되는 아들의 울음 섞인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막 도착한 경찰 아저씨에게 하는 말인지, 아빠를 때리려고 한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이제 경찰 아저씨 왔으니 두 분이 화해할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조금 전까지 울부짖던 이는 이제 나를 보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잘못한 거 없어. 엉엉엉."

"**, 경찰 아저씨가 아빠 잡아갈까 봐 그래?"

"엉엉... 아니야. 아빠는 죄 없으니까 잡아가면 안 돼. 내가 다 봤어. 아빠는 잘못한 거 정말 하나도 없어."


이 작은 사람이 우는 이유에 적잖이 놀랐다. 두 어른이 싸우는 게 무서워서도 아니고, 그 할아버지가 아빠를 때리려고 해서도 아니고, 경찰이 아빠를 잡아갈까 봐 우는 거라니... 마음속으로 누르고 있던 남편에 대한 화가 새어 나왔다. 그때부터 남편이 한심하게 보였다. 화를 누르지 못해 아이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니...


"응. 맞아. 아빠랑 할아버지랑 서로 안 때렸어. 엄마도 다 봤어. 아무도 안 잡아가. 걱정 마. 엄마가 약속할게. 둘이 곧 화해할 거야. 우리 지켜보자."라고 말하고 나는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꼭 잡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사과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오히려 죄송하다며 포켓몬 빵은 도착하면 챙겨 놓을 테니 연락처 남겨주시면 찾아가시라고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난 이게 왜 그렇게 다행이던지 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경찰이 개입해서 서로 사과하도록 하고 상황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아이들도 조용히 지켜봤다. 아이들이 지켜보는데 둘이 쿨하게 화해하면 좋으련만, 남편도 할아버지도 이유와 핑계가 장황했다. 아무튼 두 사람은 화해했고 경찰은 돌아갔다.


남편까지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교회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큰 아이이 표정에서 평안을 찾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들이 옆에 있는데도 왜 그렇게 분노를 참지 못하느냐고 남편에게 한소리 하려다가 밝아진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이거면 되었다' 하고 말았다. 아이들 앞에서 나까지 성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저 온 가족이 무사히 교회를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목사님이 오늘은 남편에게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설교를 전해주시길 바랐지만 설교 말씀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교회를 다녀오니 참 좋다고. 그리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까 남편에게 한마디 하려던 걸 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포켓몬 빵을 찾아 간식으로 먹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은 금세 다 잊은 듯, 어떤 부실이 나왔다고 좋아하고 빵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큰 아이는 7살, 둘째는 4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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