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큰 감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단연코 "사랑해" 이 세 글자가 아닌가 한다.
어떤 사랑에는 이별, 아픔, 외로움이 숨어 있어 슬프기도 하지만
어떤 사랑은 대상의 존재 자체가 "그냥" 슬프다.
나는 양가에서 첫 손주였다. 그러니 이모 삼촌 고모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난 그 사랑을 편안하고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 말은 즉, 이모 고모 삼촌들과 나는 각별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모 고모 삼촌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었다.
사촌동생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나는 꽤 가까이서 보아왔다. 내가 모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모와 고모들은 그녀들의 아들 딸 얘기를 하다가 내 앞에서 다 눈물을 보였다.
그 꼬맹이들의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점을 자랑처럼 신나게 얘기하다가 별안간 울어버리는 것이다.
"으... 불쌍한 내 새끼"
라며...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 엄마에게서 많이 보던 모습이니까. 그게 엄마들의 사랑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좀 많이 웃겼던 건 막내삼촌이다. 모든 친인척들을 통틀어 나를 제일 예뻐해 준 사람이 막내삼촌이었다. 막내삼촌은 예쁜 외숙모랑 결혼해서 예쁜 첫 딸을 품에 안았다.
언젠가 삼촌, 외숙모랑 밥을 먹는데 삼촌이 입꼬리를 귀에 걸고 말했다.
"은*야, 미안하다. 삼촌이 우리 은* 진짜 사랑하는데, 이제 삼촌은 은*보다 우리 OO가 더 예쁘다"
싱글벙글하면서 시작한 말은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떨렸다. 외숙모 앞에서 삼촌 창피할까 봐 내가 재빨리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냐고 했지만 삼촌이 말하다가 울컥하는 거, 나는 분명히 봤다!
아니, 자식이 조카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울컥할 일인가? 늘 개구쟁이 같기만 하던 삼촌의 그런 모습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갑자기 진지해지니까 웃기기도 했다.
'삼촌이 아빠가 되더니 철드는 건가... 아, 좀 재미없는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아무튼,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자기 자식 예쁘다면서 다 울었다.
나도 점점 나이를 먹고, 나름 어른이 되었다. 이모 삼촌 고모들 뿐 아니라 이제 친구들도 아기 엄마가 되었다.
친구들이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된 모습을 보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얘가 엄마라고?' 하며 그 친구들이 만들어 낸 작은 사람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이고~!!!"
정말 별 말도 아닌 이 세음절 안에는,
귀엽다, 예쁘다, 어쩜 이렇게 작아—
이런 마음들이 와르르 섞여 있다.
그때 친구가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아기 예쁘지? 조카 생겨봐 더 예쁠걸? 조카 생기면 물고 빨고 예뻐서 난리 난다 난리 나."
조카도 없었던 시기라 막연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근데, 니 새끼 낳아봐,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돼. 아까워서 물지도 못해"
아기를 예뻐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렇게 단계적으로 존재한다니. 그때는 정녕 알 수 없는 깊이였다.
깊은 밤, 나는 매일매일 잠든 아이들을 관찰한다.
첫째는 첫째대로 예쁘고 기특하고
둘째는 둘째대로 사랑스럽고 귀엽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얘네는, '짠하다!'
어쩌다 이 귀한 천사들이 보잘것없는 내 옆으로 와서 매일 밤 쌕쌕 거리며 사랑을 뿜어내고 있을까.
아, 가여워라. 아, 불쌍해라.
또 어떤 밤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는 데서 시작해 오래된 사진들까지 거슬러 추억 여행을 하게 된다.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 막 걸음마를 배우는 모습, 새 장난감을 손에 쥐고 신난 모습,
무언가에 무서워서 우는 얼굴, 둘이 다투며 찡그린 표정, 엄마에게 혼나 울음을 터뜨리던 얼굴까지
그 어떤 모습도 다 귀하고 예뻐서 미소를 머금고 보다 보면, 어느새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에서 철썩 거린다.
사진 속 내 새끼들이 울고 있어도 웃고 있어도 다 미안해진다.
'그때 화내지 말걸, 그때 더 많이 안아줄걸, 그때 더 많이 표현해 줄걸... 못해준 것만 생각나. 너무 미안해. 이런 못난 엄마여도 늘 최고라고 말해줘서 고맙고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아깝다. 정말 아깝다.
꼭 끌어안으면 소멸될까 아깝고, 아기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면 이 꼬순내가 사라질까 아깝다.
너희가 크는 게 아깝다. 이 찬란한 시절을 하루하루 내가 소비해 버리는 것 같아 아깝고 미안한 마음이 가슴 속에서 계속 소란을 일으킨다.
아까워 죽겠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 걸 알기에 슬프다.
'불쌍한 내 새끼...'
나는 비로소, 자식이 불쌍하다는 말을 이해해 가고 있다.
아무리 질리도록 사랑한다고 말해줘도 부족하다.
내가 너희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을 훨씬 넘어선,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무엇이다.
사랑이 벅차서, 슬픔이 차올라서,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버릴까 봐 아까워서.
기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너희를 품에 안고 있을 때면,
나는 사랑과 슬픔과 감사와 미안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사랑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감정인지 모른다.
잃을까 봐, 지나갈까 봐,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이 아까워서.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을
나는 아직도,
단지 “불쌍한 내 새끼”라는 말로밖에 부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