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이를 키우느라 버티고 있는 엄마에게
얼마 전, 쌍둥이 조카들의 돌잔치가 있었다.
형님은 삼 남매를 키우며 육아휴직 한 번 쓰지 못한 채 일을 이어가고 있다.
첫째는 이제 세 살, 그리고 스물한 달 차이지만 연년생인 쌍둥이 남매를 키우고 있다.
(내가 남편보다 연상이고, 아주버님은 결혼을 늦게 한 편이라, 형님이 나보다 어리다... TMI)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며 흘러가는, 숨 고를 틈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돌잔치가 끝날 무렵, 첫째 아이의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의 주인공인 동생들에게 시선이 모두 쏠린 탓이겠다. 평소에는 작은엄마를 잘 따르고 내 품에도 곧잘 안기던 아이였는데, 그날만큼은 엄마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 손을 뿌리치는 아이를 향해 나는 더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애틋한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그런 나와 상대적으로 형님은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언제 저만큼 키워요?”
짧은 질문에는 잠 못 든 밤과 바삐 흘려보낸 시간들이 힘겹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 해주고 싶은 말이 수없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때가 너무 그립고, 또 미안해요. 솔직히, 우리 애들도 이제 그만 컸으면 좋겠어요.”
지나와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육아에도 단계별로 느끼는 감정들이 다양하다는 걸 나는 먼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참 이기적인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나 역시 얼마나 간절히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랐던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 역시 지친 몸을 눕히면, 나는 어김없이 핸드폰을 켠다.
하루를 견디느라 잔뜩 굳어 있던 마음은, 사진 속 아이들을 보는 순간 풀린 실처럼 스르르 풀어진다.
방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며 바라보던 얼굴인데, 작은 화면 안에서는 왜 이렇게 사랑스럽기만 한지 늘 의아하다.
그날의 장면 몇 개를 골라 SNS에 올리며, 투덜거리듯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오늘도 계속 안아달라는 아들. 안 안아주고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글 아래 달린 친구의 댓글 한 줄이 내 생각을 멈춰 세웠다.
“그냥 안아줘라, 애미야. 앞으로 얼마나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살짜리 아이와 괜한 신경전을 벌이며, 안아주지 않겠다고 버텼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아이에게도, 그날의 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래, 맞네. 내일은 좀 더 안아줘야지.’ 하고, 스르륵 잠이 들었었다.
몇 해가 지나,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체력적으로 가장 고되었던 시절은 첫째가 여섯일곱, 둘째가 세네 살이었을 무렵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쯤이면, 늘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바닥을 드러내던 때였다.
저녁 내내 아이들을 혼내다 겨우 재워놓은 밤, 나란히 누운 남매의 얼굴을 보면 어김없이 미안함이 밀려왔다.
천사처럼 고요한 아이들의 얼굴 앞에서, 나는 왜 늘 소리 지르는 엄마밖에 될 수 없는 걸까.
아이들이 사랑스러울수록, 내 모습은 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을 다시 저녁으로 돌린대도 나는 아마 똑같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을 것 같았다. 부족한 엄마를 만난 탓에 우리 아이들만 상처받고 크는 것 같았다.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울었다.
그리고 또다시 SNS에 긴 반성문을 올렸다.
“나는 정말 엄마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오늘 너무 많이 화냈다. 미안해.”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글에 위로의 말들이 조심스레 쌓였다.
"누구나 화내며 키워."
"그럴 수도 있지, 엄마도 사람이잖아"
"너무 자책하지 말고 푹 자"
"오늘도 애썼다."
그중에서도 유독 오래 생각이 머문 말이 있었다.
“애들은 뒤끝이 없어. 내일 아침에 잘해줘”
맞다. 아이들은 어제를 오래 붙잡지 않는다. 어제의 꾸중을 오늘까지 들고 오지 않는다.
그렇게 혼나고도 다시 “엄마, 엄마” 하며 매달리고, 떠들고, 안긴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믿고 사랑한다. 이런 신뢰를 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 잘하지 못했다고, 엄마로서 부족했다고 무너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내일의 나를 또 받아줄 테니까.
육아는 매일 되풀이되는 실패와 용서의 순환이다. 그리고 그 용서의 열쇠는 언제나 아이들이 쥐고 있다.
아이들은 어제를 따져 오늘의 엄마를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불러도 와줄 엄마, 지금 안기면 받아줄 엄마, 지금 나를 버리지 않을 엄마라는 걸 몸으로 알고 믿을 뿐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날 형님의 "언제 저만큼 키우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그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빨리 지나가길 바라던 시간을 지나와서야 비로소 그리워지는 마음 - 지금은 버티는 사람에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라도 - 언젠가는 닿게 될 감정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아직은 실감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 역시 그 시간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랬다.
다만 지금의 버티는 하루하루가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처럼 느껴질지라도, 아이들에게는 전부라는 것,
그리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이 시간이 언젠가는 그리움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남겨두고 싶다.
오늘이 조금 어긋났다면, 내일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이들이 매번 그러하듯, 우리도 그렇게 하루를 건너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