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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 Aug 19. 2020

게으름 피우기의 요령

하루종일 침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에게


바깥 열기가 덮치다 못해 사람을 멍하게 휘두른다. 정신을 차리려 카누 두 봉지를 진하게 타 얼음을 동동 띄워 

빨대로 쪽 빨아들여봤자 잠깐 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차가운 바람을 한두 시간 즈음 쐬고 있자니 기운이 더 빠져나가는 듯하다. 바람이라도 쐬면 나을터인데(플라스틱 날개 4개가 만들어내는 게 아닌 자연바람 말이다) 요즘 시국이 통 허락해주질 않는다. 

그렇게 무기력에 젖은 채로 할 일은 저기 멀리 안 보이는 곳에 제쳐두고 '잠깐만 쉬었다 해야지'하고 침대에 누워버리는 순간? 끝. 게임오버다 완전히.

제쳐둔 일은 무슨 눈에 보이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충전기조차 줍기 귀찮아진다. 그러다 보면 어쩐지 입맛도 없어지고 그대로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허여멀건한 천장만 봤다 감았다 한 채로 흘려보내게 된다. 가장 큰 자세 변화는 누워있던 몸뚱아리를 돌려 엎드리는 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해대다 슬쩍 본 창문에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걸 보고야 만다면 '아 오늘 하루도 아무것도 안 하다가 끝났구나.' 싶다. 오후 7시에도 낮과 같은 여름하늘이 어두워졌다는 건 지금이 몇 시쯤이 된 건지, 내가 몇 시간을 침대에만 있던 건지, 시계를 보지 않고도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후 얻게되는 죄책감을 온전히 하루를 꾸려낸 나의 몫이다. 간단하다. 죄책감을 상쇄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게으름을 극복한 건 아니었다.  그저 더 요령껏 할 일을 하면서 게으르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어떠한 작은 강연에서 <미루지 않는 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연에서는 한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 일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연결시키라 제시했다.

예를 들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영어공부'고, 좋아하는 것이 '요리'이라면 영어를 쓰는 요리 유튜브를 찾아보는 거다. 해야만 하는 일이 '독서'고, 좋아하는 것이 '동물'이라면 동물에 관해 쓰인 책을 읽는 거다.

해야하지만 하기 싫은 일에 역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껴넣어 버리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써먹을 수 없는 일도 있겠지만 분명 쓸만한 팁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내 방법도 얼추 맥락은 비슷하다. 해야만 하는 일을 게으름과 함께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한번 침대 위로 몸을 옮긴 순간 그 네모나고 푹신한 곳에 갇혀버릴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무도 나를 가둔 적은 없지만요)

그러니, 그 네모 칸 안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영어 쉐도잉 프린트, 영단어 노트와 좋아하는 색의 펜 몇 자루, 읽고 싶던 책, 노트북, 아메리카노! 그제는 커피 대신 초콜릿이었다.

핸드폰은 일부러 안 가져다 놓을 때가 많다. 아까 충전기 줍기도 귀찮다고 말했죠? 나중에 핸드폰이 하고 싶어도 그걸 가지러 가기가 귀찮아서 포기하고 에라이 됐어, 딴 거 하지 뭐. 하게 된다. 이렇게 써 놓으니 세상 게을러 보이네 정말. 아무튼 이로써 해야만 하는 일은 나와 함께 갇혀버렸다. 여기서 한 번 뿌듯해하자. 눈에 안 보이게 치우는 게 아니라 내 영역으로 끌고 온 게 어딘가.

바른 자세로 꼿꼿이 허리를 피고 공부할 필요도 없다. 전과 다름없는 배 깔고 엎드린 자세로 영어 프린트를 앞에 놓고 공부를 시작한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하면 빠져드는 성격 때문인지 꽤 오랜 시간 계속할 수 있다.

어디서 척추수술 OOOO만원...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만, 요즘 세상엔 침대에 놓을 수 있는 간이 테이블도 몇 천 원에 파니 그걸 이용하는 법도 있다.

그럴 거면 그냥 책상에 제대로 앉아서 공부하라고요? 심리적 부담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바르지만 불편한 자세, 딱딱한 책상,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공부>

와! 정말 글자만 봐도 환장의 세트다. 그러니 한 개는 포기하는 대신 한 개는 양보하는 거다.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기보다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을 만든다. 꼭 오래 지속하지 않아도 되고, 가져와버린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마음을 되새기며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간다. 외워야 되는 영단어가 100개면 50개를 외우다 잠깐 노트북으로 한 눈 팔았다가 돌아와(안 돌아오고 추천 영상의 파도를 타버리면 아니되옵니다), 나머지 50개도 외운다. 잘 외웠다면서 미리 타 온 아메리카노도 한 모금 마시며 뿌듯해한다.


이렇게 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할까 과연. 나는 안 하는 것보다야 오백만 배 낫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며칠을 하고 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허무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당장 대단하고 완벽하게 하루를 가꿀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내면 된다. 아무리 엎드려서 공부하는 게 편하다 한들 몸이 배겨지는 순간이 오고, 그럼 자연히 내 발로 책상이 낫겠다 싶어 일어나게 되더라.

처음부터 '좋아 오늘은 반드시 단어 100개와 문법 5개와... ' 하며 책상에 앉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면 안 되고 고치고 싶은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일.

나의 경우는 핸드폰을 보는 일이었다. 딱히 알람이나 연락이 오지 않을 때에도 그 작은 물체를 보고 있는 시간이 불필요하게 많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은 자기 전에 충전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원이 꺼질 정도로 방전을 시켜버리는 건 아니지만, 2~30분 정도 쓴다면 간당간당할 정도로 남겨둔다.

그럼 다음 날 '적어도' 일어나자마자 폰을 붙들고 있는 시간은 없어진다. 적어도 고속충전기가 아닌 일반 충전기에 연결되어있는 몇 시간 동안은 폰을 보지 않게 된다.

한 번 이걸 깨닫고 난 뒤로는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려 애쓴다. 어쩔 때는 그렇게 아침에 연결시켜놓고 밤이 될 때까지 잊어먹어버리기도 하는데, 반나절 넘게 폰을 보지 않는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

7시가 된 지 33분이 지났고 창 밖을 보니 옅은 남색 정도의 하늘이 깔려있다.

어제 적어놓은 오늘 할 일 목록에는 글 쓰기가 있었고, 나는 지금 거실 소파에 철퍼덕 엎드려,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며, 요령껏 게으름을 부리는 중이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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