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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봄 Oct 12. 2020

아무튼, 동생

오랜만에 시간이 맞은 동생과 데이트를 하던 날이었다. 내가 보조강사로 근무하던 입시미술 학원의 학생 중 한명이었던 그는 어느새 나와 같은 보조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적으로 시간을 잡고 만난 건 거의 처음인지라, 끝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던 와중 그가 가방에 한 책을 꺼냈다.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인데 읽으면서 내 생각이 종종 나곤 했다며. 내가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책을 알아내는 건 내 귀중하고 사소한 취미 중 하나인지라 그 자리에서 바로 북사이트 장바구니에 그 책을 넣어뒀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나 그리 길지 않은 그 책을 완독한 참이다.


책의 제목부터 사실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필자와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써내려가고 있겠구나.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떠올랐다는 그 역시 나를 언니의 대상으로서 투영해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언니'라는 위치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필자는 한 목차의 제목에서부터 이렇게 말한다.


'동생은 어려워'


좋은 언니 되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는 필자는 지금껏 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경험이 많았기에, 역으로 누군가가 본인의 동생일 되는 상황을 낯설어 한다. 

내가 언니를 어려워 하는 이유도 같은 격이다. 호적 메이트로는 남자 1명이 위에 있고, 가까운 친척들 중에서도 언니는 무슨 또래 손윗사람도 없다. 3년을 꽉 채워 일을 하고 있는 미술학원은 동료 선생님들이라고 해봤자 10명 남짓이고 그 외는 아주 다수의 '동생뻘' 학생들이 차지한다.

주위 환경 탓인지 내 성향 탓인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생각한다. 초등학생 때 엄마아빠 따라 다니던 교회 유치부에서도 아기가 아기들을 솔선수범해 다녔었다.) 나는 동생이라는 존재가 익숙하고 편안하다.


나이차이가 손가락 다섯 개를 채우지 못한다는 걸 아이들(학생들)도 알아서인지 사실 호칭만 쌤을 붙일 뿐이지 가끔은 문장 끝마무리도 '요'를 붙였다 안붙였다 한다. 이러나 저러나 동생뻘의 내가 아주 예뻐라 하는 아이들이다.

사실 책 속의 필자처럼  '적정한 선을 지키면서 동생들을 그렇게 예뻐하는 법'을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던 건 아니다. 조언과 꼰대의 경계가 모호한 요즘 세상에, 말하는 이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는 일을 얼마든지 있었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고민들을 동생들 앞에서 지레 겁먹고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들 얼굴을 마주하면, 아니 그 뒷통수를 멀리서 발견하고 존재를 인식한 순간 앞뒤 따지지 않고 우선 부둥부둥하고 싶은 (이보다 잘 맞는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실 단순히 나이로 동생/언니를 나누는 아니라면 여러모로 나보다 언니같은 아이들도 분명 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른스럽고 자시고 간에 내가 겪은 입시를 고대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없던 정과 걱정도 언니 마음으로 붙여 버리게 된다. 본능적인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이 마음은 아이와 더 친밀해 질수록 스킨쉽으로도 발전해버린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빗질을 해주거나 손등을 토닥이는 게 내가 동생들에게 하는 애정의 표현이다.


이렇게 동생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져왔던 시간동안, 언니라는 존재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야 주변의 언니가 없었으니깐.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한 건 유료 소모임에 다니고 나서 부터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이 소모임에는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웬만하면 어딜가든 내가 막내였다. 그 말인 즉슨? 언니가 아주 많았다! 낯설고 어려운 환경이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내가 이 모임에서 낯가림을 제치고 선두로 어려웠던 건 언니들을 대하는 방법이었을 정도다.


혼자 추측하건데 내가 이토록 언니들을 낯설어 하는 건 무언가 '언니'라는 단어에서 오는 기댈 있는 사람이라는 분위기 때문인 같다. 기대야만 할 것 같은 사람. 하지만 기대면서 극복하는 타입이 아닌 걸! 혼자서 단단히 그도 아니면 언니가 아닌 이들에게 기댈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손윗사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예를 가추기도 하는 나에게는 그렇다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차라리 기대겠습니다.

그들의 어떤 언행도 나에게 있어 선을 넘은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날 예뻐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예뻐해주면 그에 대한 리액션을 어떻게 할 지 몰라 베베 꼬여 고장나 버렸다.

그러니깐 언니라는 존재들을 환경에 두어보니 그곳에서 난 딱 몸 둘 바를 모를 상태가 된다는 걸 그 모임들로 깨달은거다.


예뻐하는 일과 예쁨받는 일


뭐가 그리 다를까 싶은데 뭐가 그렇게나 다르더라.

멋진 언니가 될 뭣도 없다.

다만 온 마음껏 예뻐하는 일이 받는 것보다 한 오조오억배쯤 더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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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언니_ 원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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