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의 끝자락 나는 캐리어와 함께 공항에 서 있었다. 유일한 친구는 작은 캐리어 한 개 뿐.
지금은 오히려 낯선 풍경이 되어버린 북적거리는 공항. 부모님이 그다지 여행을 즐기시지 않는 탓에 초등학생 이후로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불과 이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공항에 오게 되었다. 즉흥적인 나 홀로 여행이었다. 이주일 전 학생들 개학에 맞춰 약간 여유로워진 미술학원 아르바이트에 이때다 싶어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계획했다. 몇 년만의 해외여행에 들떠 한 달 전부터 갈 곳을 정하고, 더 이상 준비할 게 없을 만큼 철저히 준비하다 보니 뜬금없는 자신감 하나가 생겨났다. 이 여행을 무사히 다녀오면 말이야, 다음에는 혼자도.... 가볼만하겠는데?
그게 이 즉흥적인 여행의 시발점이었다. 베트남을 '무사히' 다녀오고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그 자신감 하나로 일본행 티켓과 숙소를 예약했다. 2박 3일간의 도쿄 여행.
이 여행은 '나 홀로' '첫' '해외여행'이라는 사실만으로 뭐 하나 특별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만 더욱더 특별한 일정 하나를 끼워 넣었다.
바로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 자퇴를 하고 제과 쪽으로 진로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여행 계획 대부분도 디저트와 관련이 있었다. 제과 도구 상가, 디저트 맛집 탐방 등등. 거기에 해외에서 클래스까지 들어보면 완벽한 디저트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친구 파파고를 켜 놓고 열심히 일본어로 구글링을 해 찾아낸 클래스 정보가 모여있는 사이트에서 다시 한번 철저한 번역투로 강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한 학생입니다. 이번에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진행하시는 클래스에서 수업을 듣는 게 가능할까요?
죄송하지만 일본어는 할 줄 모릅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나였지만 절반은 답이 오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서 일본어 수업을 듣겠다니, 내가 봐도 무리한 부탁이었다.
그렇게 포기를 해야 하나 싶던 찰나 답장이 하나 왔다.
'수업 가능할 것 같습니다.'
놀란 눈으로 (또다시) 번역기를 돌려보니 강사분이 이전에 2년 정도 한국에 거주한 적이 있으셔서 한국어로 수업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 디저트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겨우 길을 찾았던 디저트 샵에서 욕심이 나 종류별로 산 케이크는 물려서 절반을 남겼고, 제과 도구 상가에서 일본어로 가게 주인 분과 능숙하게 대화하시는 관광객분들을 부러운 눈으로 봐야 했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여행이었다.
여행 둘째 날, 클래스 강사분이 미리 알려주신 역으로 가니 갑자기 내리는 비에 길을 헤맬까 마중을 나와주셨다. 클래스는 자택 게스트룸으로 보이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에 거주한 적이 있으시지만 많이 까먹으셨다는 한국어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셨고, 빵이 부풀 동안 디저트 책들 중 관심 가는 게 있으면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2-3시간 간의 수업이 끝나고 나는 이미 그곳에서 얻은 경험으로 마음이 구워지고 있는 빵처럼 한껏 부풀어 있었다. 부푼 마음으로 짐을 챙기고 있는 나에게 강사분이 한봄 씨, 하며 종이를 몇 장 건네셨다. 오늘 배웠던 빵의 레시피가 적혀있던 그 종이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들여다보고 아주 특별한 점을 발견했는데.. A4에 꽉 차게 적힌 그 레시피들이 모두 손글씨에,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는 점.
원래는 일본어로 프린트해서 드리는데 못 읽으실 것 같아서 한국어로 적었다며, 글씨가 지저분하고 틀린 부분도 많을 거라며 부연설명을 붙이셨지만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타국에서 만난 이의 다정에 반해있었으니.
혹시 여행할 시간이 좀 남아있으면 여기도 가보라며 근처에 베이킹 재료와 도구가 파는 곳을 적은 쪽지도 들려주셨다.
일본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항상 긴장이 된다. 알게 모르게 퍼트리고 있을 영향에 책임을 느낀다.
다만 개인의 경험을 들어볼 마음이 없이 일단 인종차별이 그렇게 많다던데, 하며 굳이 굳이 초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그날에 겪은 온기들은 내게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단순히 특별한 체험을 해보고자 간 곳에서 예상치 못한 큰 마음을 얻었다. 나라와 나라간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