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프러포즈. 프러포즈를 생각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나는 보통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많이 떠올렸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센트럴파크의 호수 앞에서 대화를 하던 남녀가 있고, 갑자기 남자가 무릎을 꿇고 반지를 전하는.. 뭐 그런 장면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의 프러포즈는 그와 같지 않다. 결혼준비를 한참 진행한 다음 가장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절차가 프러포즈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결혼을 제안하고 허락하는 것이 아닌, 조금 과장하면 “나 프러포즈까지 했다. 이제 다 준비된 거지?”로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난 인스타에 올라오는 온갖 프러포즈 자랑 게시물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물론 결혼을 하고 싶을 때 ‘아, 저들은 결혼하나 보다..’에 대한 부러움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비싼 호텔에서 꽃잎을 뿌려놓고 초를 켜놓고 벽에 “Marry me?”가 달려있는 그런 프러포즈는 내가 원하는 프러포즈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배우 남궁민이 프러포즈를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두 커플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아마 카메라를 미리 숨겨두고 녹화를 한 듯하다.) 둘만의 대화가 꽤나 진행되던 찰나 남궁민이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자친구가 ‘뭔데? 말해봐, 들어줄게.’라고 하니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가 살짝 자세를 낮추고 반지를 꺼내며 ‘나랑 결혼해 줄래?’를 담담하게 말하는 남궁민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원하는 프러포즈는.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여느 평상시의 날과 같은 무드에서, 담백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그런 프러포즈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사는 한 그런 프러포즈를 받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프러포즈는 무슨, 성황리에 결혼이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내가 얼마 전 프러포즈를 받았다. 결혼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오랜만에 남자친구와 간 여행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를 돌아와 보니 내가 좋아하는 꽃바구니와 와인이 예고 없이 놓여있었다. 마침내 생일 즈음이었던지라 (그리고 이번 해의 생일선물은 따로 받지 않는 것으로 약속했던지라) 생일을 그냥 넘어가기는 좀 그래서 남자친구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인 줄 알았다. 평소 이벤트를 굉장히 좋아하고 (원하는) 나에 비해 남자친구는 무덤덤의 끝을 달리는 남자인지라 연애 초반에는 다툼이 잦았다. 서로 원하는 것과 해줄 수 있는 것이 다른 우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친구가 깜짝 이벤트라니..! 게다가, 이 정도의 이벤트에 엄청난 감동을 받는 나 자신이라니! 여러 가지의 의미로 많이 놀란 순간이었다. 마트에서 사 온 안주와 준비되어 있던 와인을 마시며 기분 좋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있던 때, 남자친구가 나에게 뒤늦은 생일편지를 건넸다. 선물은 없어도 편지는 있어야 한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이것마저 은근한 감동이었다. 그리고 생일편지인 줄만 알았던 그 편지지의 말미에는 ‘나와 결혼해 줄래?’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웹툰을 보면 주인공인 유미 몸속에서 여러 가지의 감정 세포들이 살고 있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세포들이 있다면, 편지를 읽는 그 순간에 어떤 세포가 비상벨을 누르고 모든 세포들에게 ‘비상이다!!!!!’를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비상!!!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예고 없는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예쁘게 울어야 하는 것인가? 감동스러운 표정을 하며 ‘이게 뭐야아~’라는 멘트를 날려야 하는 것인가? 도당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움에 고장 나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당황스러움+감격으로 맺혔던 눈물 몇 방울은 저 수많은 생각을 할 동안 없던 일이었던 것 마냥 바로 들어갔다. (남자친구는 그래도 눈물이 맺힌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한다.) 얼떨떨했다. 평소에 서프라이즈 이벤트라곤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람이 나에게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을 선물한 것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꿈꾸던 그 담백한 프러포즈를 받은 주인공이 나 자신이 되었다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감격스러웠다. 너무 일상적인 순간이었던지라 그 당시를 기록한 어떠한 영상도, 사진도 없다. 그래서 당시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정과 분위기는 나와 남자친구만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순간이었음을 다시금 되새긴다.
이 프러포즈를 계기로 나는 내년 결혼을 준비하는 예비신부가 되어있다. 그냥 그저 회사원 신분으로 살아가는 나였는데, 요즘 나의 일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신부님’으로 불린다. 막상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가도, 지금은 어디에서든 내가 먼저 ‘제가 신부인데요’라는 말까지 한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렇게 안되면 어떡하지 등등.. 시작에 앞서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엄마가 해주신 말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엄마는 네가 결혼준비하면서 정말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맞다. '신부님'이라고 불리며 행복한 준비를 해나가는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속상할 필요는 절대 없다. 오히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나의 즐거움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신부로서의 이 준비기간을 마음껏 행복하기로 다짐했다. (실제로 이렇게 마음먹은 이후 모든 준비 과정이 감사하기만 하다.)
결혼을 준비하기 이전엔, 빨리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맞이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막상 다음 챕터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결혼을 기점으로 인생을 나누는 것이 맞는 건지에 대한 의문도 든다. 그렇다면 난 지금 내 인생을 어떠한 관점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챕터는 잘 써내려 온 것이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아, 나는 아직도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