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릴까봐 하는 결혼기록
결혼을 한 지 몇 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얼마 전 나는 결혼을 했다. 내 삶에 있어서 한 번쯤은 강렬히 있길 원했던 순간이었는데,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놓았다 한들 혹시나 나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신혼여행의 여독이 거의 다 해소되어 가는 지금, 글로나마 그때의 기억을 잠시 잡아두려 한다.
결혼식 며칠 전부터는 청심환을 먹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늘 그랬듯 그냥 그 긴장감과 떨림마저도 생(?)으로 부딪혀보자고 다짐했다. 안 떨리고 즐길 수 있으면 땡큐고, 긴장감에 절어버리더라도 그게 제일 자연스러운 내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결혼식 당일의 기억은 나름 생생하다. 정신은 없었지만 극도로 긴장하지도,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떨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로소 내가 꿈꿨던 장면의 결혼식을 별 탈 없이 해내고 있다는 마음에 스스로 감동이기도 했달까. (별꼴이다.) 더욱이 혹여나 이 기쁨을 충분하고 생생히 느끼지 못할까 싶어 최대한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우선시했다.
짧으면서도 아주 긴 여정이었다. 쉽고 명료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행복한 만큼 알지 못할 불안감도 많이 들었고, 불안한 만큼 잊고 싶지 않을 행복감 또한 존재했다. 결혼이라는 것이 그 자체의 의미도 크지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두어 달 정도의 시간 동안에 결혼식에 진심으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전달하는 시간이 제일 그러했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한 동네 친구들부터, 사회생활을 하며 비교적 최근에 깊게 친해진 사람들까지. 나의 소중한 주변인들을 압축적으로 만나며, 내가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그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나의 행복을 바라는지 몸소 알 수 있었던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말로 다하지 못할 이상하고 뭉클한 감정이었다. 흔히 경조사가 끝나면 그곳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귀댁의 경조사에도 참석하여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번 기회에서야 그 진심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꼭 내가 받은 감사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결혼식의 하객으로 참석할 때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헤벌쭉한 신부가 있는가 하면, 감정에 못 이겨 우는 바람에 하객들까지 울려버리는 신부도 있었다. 나는 어느 편의 신부가 될까, 나도 친구들도 궁금해했다. 내 가족들이 당일 백 퍼센트 울 것이라고 장담했기 때문에 가족들만 쳐다보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신부대기실에 도착해서 엄마를 마주한 순간,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며 중간중간 벅차오르는 순간마다 눈물이 조금씩 나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입장하기 전 드레스를 재정비할 때 드레스 이모님께 물었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내가 울어서 콧물이 나오면 어떡하냐고. (울어서 사진이 못 나오는 것보다 만성 비염 환자는 콧물이 흐르는 것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이모님은 눈물보다도 콧물이 수습이 어려우니 웬만해서는 정말 울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해 주셨다. 오케이, T의 면모를 진정으로 내뿜을 때다. 이모님의 말을 듣고 입장 후 어떠한 순간에도 울지 않아야겠다는 굳센 다짐을 했다. 눈물을 쏟고 닦아내느라 정신없는 신부는 괜찮아도, 콧물을 쏟고 닦아내느라 정신없는 신부로 기억되기는 싫었다. 당시 신랑도 이모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친구의 축사로 내가 울먹거릴 때 신혼여행지의 이름을 거듭 반복하며 나의 슬픔을 누그러트렸다. 그렇게 나는 여러 번의 위기를 조금은 과장된 웃는 모습으로 넘길 수 있었고, 결혼식이 끝난 후 아빠 친구들로부터 신부가 너무 웃어서 아빠가 서운했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도 웃었더니 뇌에서도 이 사람이 행복하다고 인지를 했는지, 나는 마치 내가 정말 헤벌쭉 신부로서 성공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밤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 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였다. 나는 그 통화를 시작으로 비행기에 탈 때까지 내내 대성통곡을 했다. 대학생 시절 어학연수에 갈 때도 그랬다. 엄마는 내가 외국에 팔려가는 사람인 것처럼 공항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 울었다. 난생처음 자식과 하는 긴 이별이 못내 슬펐나 보다. 하지만 나는 꾸역꾸역 울지 않았다. 처음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하니 무섭긴 했어도, 나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엄마, 아빠가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비행기를 탈 때는 글쎄.. 아주 찔끔? 눈물이 고였던 것 같다. 그래도 잘 참았다. 그리고 낯선 땅의 호텔에 어영부영 체크인 후, 호텔 방문을 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주저앉고 꺼이꺼이 울어재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놓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풀려서라고 믿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비슷했다. 물론 전화 상의 엄마가 이미 (예상한 대로) 울고 있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느낀 엄마의 감정들을 뒤늦게 고스란히 전해 들으니 그런 사소한 부분들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 미안하기도 했고, 아마 이번에도 지금까지 있던 나도 모를 두려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풀려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헤벌쭉한 신부가 되었다며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면서 와중에 잘 버텼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 터뜨려진 울음은 멈춰지지 않았고, 그렇게 비행기에 올라버린 탓에 신랑은 아마 갓 결혼하고 아내를 울린 남편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혼식 직전부터 직후까지 들었던 수많은 감정들을 지나가는 시간 속에 묻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바람에 이렇게 기록용으로 두서없이 적었다. 이제 그날의 사진들과 영상이 도착하면 조금 더 그날에 저장된 감정들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준비하느라 정말 바쁘고 숨 가쁘게 지나간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금 아무것도 신경 쓸 게 없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결혼식을 분명 만족스럽게 했는데,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안 되고 있기도 하고.. 이렇게 어리둥절한 감정조차도 소중한 순간들이 아마 금방 오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