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여행 귀국 편 비행기에서
2022년이 끝나가는 마지막날, 호치민 여행 귀국 편 비행기에서
'코로나19로 발이 묶여있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약 3년 반 만에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아주 먼 데를 가볼까? 흠 딱히 당장 끌리진 않는데..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럼 동남아? 코로나 직전에 갔던 곳이 태국이었는데 또 동남아를? 에이 됐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정답은 동남아였다. 그래, 그냥 가볍게 베트남이나 다녀오자. 늘 이렇듯 여행 계획을 짤 때의 기분 좋은 압박감과 설렘을 느끼던 도중, 문득 이상하게도 먼 곳으로 떠나기 전의 불안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혹시 이미그레이션 통과 못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여행 중에 퍽치기당하면 어떡하지? 요즘 뉴스에 흉흉한 사건이 많던데.. 온갖 잡다한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옛날보다 나약해진 것만 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오묘했다. 20대에는 휴대폰 데이터 없이도 무서운 줄 모르고 해외 곳곳을 돌아다녔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동안 시간이 흘러 잊고 있었던 여행의 익숙함이 이제 영 불편해진 어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잡한 걱정이 무색하게 여행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이미그레이션에서 문제가 있지도, 퍽치기를 당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느 여행 때보다 의사소통까지 잘 됐던 완벽하고도 편안한 여행이었다. 겁 많고 걱정만 가득한 어른이 된 것이 영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에 그동안 코로나에 갇혀 보지 못했던 여러 세상살이를 몸소 실감했다. 맞다, 여행은 이런 거였다. 내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무한하게 마주하는 순간이랄까. 호치민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 대각선 쪽에 앉은 베트남 여자와 아이들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그 여자는 길고 고단한 일상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비행 내내 어린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가르쳤다. 아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만화만 볼 뿐이었다. 포기할 만도 한데 왜인지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그 단어를 가르쳤다. 그녀의 일방적인 대화는 지켜보는 사람에게 마저 약간의 지침을 선사했다.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눈 좀 붙이지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착륙을 앞둔 어느 때 화장실에 들렀다 나온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지켜봤던 그녀가 아니었다. 산발의 머리를 단정히 묶어내고 옷매무새를 완벽히 다듬고 나온 게 아닌가. 아, 가족들이 공항에 나와있나 보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언정 타국에서 나름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여느 딸의 설렘을 내가 방해한 것만 같았다. 나는 아이들이 공항에서 꼭 '할머니', '할아버지'를 외쳐주기를 바랐다.
여름인지라 베트남은 역시 생각보다도 습하고 더웠다. 여행지는 호치민이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도심 관광은 아니었다. 도심을 옆에 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유를 누리고 싶었달까. 물론 이번 여행을 함께한 남자친구의 취향을 조금 더 반영해주고 싶었던 마음도 앞섰다. 사람들은 관광을 할 게 아니라면 차라리 휴양지를 가지 왜 호치민을 가냐는 소리도 했지만, 여행은 원래 내 멋대로 짜는 게 다가 아닌가. 도시와 휴양을 다 누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다행히 도심에서 페리를 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어느 교외의 리조트가 있어 그곳에 묵게 되었다. 저 멀리에 건물들이 보이면서도 정작 나는 무수한 초록들과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있는 느낌이 꽤나 로맨틱했다. 이 숙소에서 머무는 관광객들은 각기의 방법으로 여유를 즐기는 듯했는데, 우리 옆 동에 유럽인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매일 화창한 낮에 홀로 테라스에 나와 앉아 화이트 한 잔을 느긋하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백발의 노인과 화창한 햇살, 그리고 흰 셔츠와 화이트 와인. 그것도 베트남에서. 어느 사진전의 액자 속 작품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저 작품에 이름이 필요하다면, '빠른 세월 속 느린 오후'라고 짓고 싶다는 느끼한 생각도 들었다.
별 것 아닌 것들이 선물같이 별 것이 되는 시간들, 바로 이게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분 좋음을 다시 찾은 것만 같은 느낌에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지는 지금이다.'
취직 이후 네덜란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친구가 코로나19 상황이 좀 더 나아진 최근 한국에 자주 방문했다. 한동안 못 본지라 첫 번째는 반가웠고, 두 번째는 즐거웠는데 세 번째부터는 친구의 재정상황이 걱정됐다. 아무리 그동안 한국이 그리웠다고 한들, 이렇게 자주 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요즘 비행기 값도 만만치 않던데..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이고 한국에 들어오면 월급이 남아나냐는 나의 볼멘소리에 친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야, 그럼 돈 번 거 아껴놔서 뭐에 쓰냐?’ … 그러게 말이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데.
지난 베트남 여행 이후 다시 반년이 흘렀고, 귀국 항공편에서 썼던 간단한 여행일지를 보니 지금 나는 무수한 핑계와 함께 별다른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피곤하다고, 돈이 아깝다고, 귀찮다고 여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이 정도면 많은 여행을 다녔겠지 라는 오만한 생각은 말아야겠다. 여행은 다니면 다닐수록 또 다른 곳에서의 나를 발견하고, 돌아보고, 내 곁에 비로소 누가 있는지를 알게 되는 마법 같은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