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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어떻게 살 것인가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by 미드스태리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고 한다. 우스갯말로 20대는 2배의 속도로, 30대는 3배의 속도로, 40대는 4배의 속도로 흐른다고들 하는데, 영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과학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며 뇌 속에 데이터가 많이 쌓이는 만큼 모든 사건들이 새롭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야 내 인생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새로워서 하루하루가 기억에 남고, 그 하루하루가 가는 것을 오롯이 느끼기에 시간이 나의 속도를 추월하는 것 같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별다른 일들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특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사건들은 휙~ 휙~ 지나가기 일쑤이니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2024년 새해를 맞아 첫 글을 쓰려니 벌써 1월 21일이 된 것에 대한 나지막한 한탄이었다. 아마 별일이 없다면 나는 곧 24년 12월의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발견할 것만 같다. 좀 젊을 때는 (그래봤자 3-4년 전에는) 한 해가 시작되면 작은 설렘과 함께 그 해의 모티브를 정해 그에 걸맞은 한 해를 꾸려나가 보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 그 낭만도 젊음과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지금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잡아보려는 안간힘을 쓸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다. 음.. 멋지게 말해보자면, 이제 시간이 흐르는 데에 있어 큰 두려움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생각해 보면 과거의 나는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연말시상식에도 많은 의미를 두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가 이 한 해를 더 멋지게 보냈느냐를 가리고, 모두가 함께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하는. 나에겐 정말이지 가슴 설레는 이벤트였기에, 주말에 집에서 모든 방송사의 연말시상식을 챙겨보는 게 연말의 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잊어버린 지는 오래다.

그런데 작년 연말 청룡영화제에서 나의 설렘이 다시 찾아온 듯한 순간이 있었다. ‘전여빈’이라는 배우가 말했던 수상소감이 어찌나 멋지던지. 이 배우는 ‘거미손’이라는 영화를 통해 여우조연상을 받았는데 크게 예상하지 못했는지 굉장히 놀라는 모습이었다. 이 배우를 처음 본 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였는데, 그때부터 담백하고 자연스럽지만 뭔가 한 방이 있는 연기를 하더니.. 결국 이렇게 일을 내고야 말았나 보다. 처음에는 놀란 나머지 울먹거리는 모습에 제대로 된 수상소감을 말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 웬걸.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또렷하게 이어갔다.

“거미집을 촬영하면서 한 100회 차 정도 관객분들을 만나면서 인사드렸는데, 그때 무대에서 많이 말했던 말이 있었어요. 거미집을 나타내는 단어가 신조어 중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 있거든요. 그게 무엇이냐. ‘중꺾그마’라고..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얼마든지 꺾여도 괜찮다고.. 마음 하나 있으면 그 마음이 믿음이 되어서, 실체가 없는 것이 실체가 될 수 있도록 엔진이 되어줄 거라고. 혹시 누군가가 자신의 길을 망설이고 있고 믿지 못하고 있다면 믿어도 된다고 너무 응원해주고 싶고요. 그리고 제가 거미집에서 정말 사랑하는 대사가 있는데요, 김기열 감독이 ‘내가 재능이 없는 걸까요?’라고 말을 할 때 이제 그 대답을 해주세요. ‘너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야, 그게 재능이지.’라고 하시는데 믿음이라는 게 참.. 나 말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믿음을 줄 때는 그게 응당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다운 마음 같아서 너무 믿어주고 싶은데 나 스스로에게는 왜 그렇게 힘들어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영화에서 그 대사를 들을 때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을 믿어줄 수 있는 마음만큼 나 스스로도 또 믿어줄 수 있으면 좋겠고, 혹은 내가 누군가를 믿어주지 못하겠다 싶을 때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믿어주고 싶어요.”

내용이 좋아서인지 전여빈 배우의 딕션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내 심금을 울리는 말이었다. 작년 스포츠 열풍으로 ‘중꺾마’가 유행했지만, 어떻게 마음이 꺾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정말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이렇게 계속하는 (그리고 결국에 해내는) 이 마음이 아니었던가. 알게 모르게 이 마음으로 2023년을 버텨왔던 내게 조용한 위안을 해주는 것 같아, 내가 지켜온 나의 마음이 결국엔 나의 지금을 있게 해 준 실체가 되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이 배우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다시 연말연시를 설레하던 나의 일부를 찾고 싶다. 일 좀 못하면 어떤가. 회사에서 좀 깨지면 어떤가. 나의 최선보다 다른 사람의 최선이 조금 더 인정받으면 어떤가. 그리고 기회 좀 놓쳐서 내가 잠시 뒤처지면 그 또한 어떠한가. 가장 중요한 건 내 안위이자 행복이다. 나의 이 작고 소중한 일상이 해쳐지지 않는 가장 일반적인 행복 말이다. 자, 이제 2024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끝내야 한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렇게 고민을 끝낸 채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하자. 분명한 것은 내가 나를 믿어줄 때 모든 것이 의미가 있어진다고.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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