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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꽃

꽃을 든 남자

by 미드스태리

꽃 선물을 받았다. 무더운 햇빛이 내리쬐던 날,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식당을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뒷모습과 그의 앞에 놓인 노랑, 주황빛의 꽃다발이 단숨에 눈에 들어왔다. 분명 저 뒷모습은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데 꽃다발과 함께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와중에 그 꽃다발이 내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었다.) 그런데 웬걸.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갈수록 그 사람이 내 남자친구가 아니던가. 놀랄 노자였다.

남자친구가 꽃다발을 준비한 게 그리 놀랄 일이냐며 호들갑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꽃다발을 들고 대중교통을 타는 행위 자체가 편치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걸 난 남자친구를 만난 후 처음 알았다. 처음엔 부정했다. 이렇게 예쁜 꽃을 선물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싫다고? 그냥 꽃선물을 하기 싫은 변명이라 생각했다. 꽃을 든 남자가 뭐가 어때서? 오히려 더 멋져 보일 텐데. (물론 난 그에 반해 꽃을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사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몇 차례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을 이해를 했고,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지만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쩌겠는가. 꽃을 못 받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연 1회 생일 때나 내가 극도로 원할 때(생일이라든가, 로즈데이라든가) 꽃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생각했다.

내 남자친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한테 말도 없이 꽃다발을? 그것도 저렇게 예쁜 꽃”다발”을 준비했다고? 이게 웬 꽃이냐며 놀라니 남자친구는 왜 원하는 걸 해줘도 그런 반응이냐는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메인 꽃송이는 자기가 골랐다며 은근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람은 안 해주다가 해줘야 감사함을 느낀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꽃도 꽃이었지만 그런 남자친구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기념일이라며 내가 좋아하는 꽃을 사봐야겠다고 생각 한 그의 하루가 고스란히 상상되었다. 꽃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준비하는 게 맞나 하는 갈등스러운(?) 고민이 들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 주변의 꽃집을 검색했을 것이고, 꽃을 정성스레 골랐을 것이며, 꽃을 받고 좋아할 내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을 거니까. 꽃다발을 들고 지금껏 기다렸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고마움과 감동스러움이 샘솟았다. 옛날부터 꽃선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꽃을 고르며 들었을 그 마음이 전부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말인지 그날 실감했다. 이런 마음을 느끼게 해 준 그에게도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한여름에는 꽃관리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 에어컨을 상시 틀지 않는 가정집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짧으면 3일? 늦어도 5일이면 모든 꽃줄기들이 시들어버리고 썩어버리면 역한 냄새까지 난다.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집에 오자마자 한 일은 꽃다발의 꽃송이들을 컨디셔닝(줄기를 깔끔히 다듬는 과정)을 한 뒤 3개의 화병에 나누어 담은 꽃꽂이였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꽃들이 좀 더 신선하고 힘 있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는 마음에 화병에 얼음까지 넣어두며 관리했고, 평소 귀찮아서 잘 안 하던 물갈이를 2일에 한 번씩 부지런히 했다. 엄마가 왜 그렇게 정성스럽게 관리를 하냐며 신기해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비록 상한 부분을 잘라내느라 길이가 조금 짧아졌지만 일주일이 넘은 이 순간까지 꽃들은 한 여름에 예쁘게 피어있다. 마치 내가 남자친구에게 보답의 형식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은 내 마음인 듯했다. 당신의 마음에 고맙고, 잘 받았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 상대를 위해 애써보려는 마음. 자신이 창피해 마지않았던(하기 싫은) 일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할 그 잠깐의 순간을 위해 노력해 보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상대방이 이어받아 조금 더 그 마음을 오랫동안 누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꼭 꽃선물이 아니더라도 어찌 보면 이런 순간들이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많았을 텐데, 그 마음들을 지나 보내버린 적은 없을지 되돌아보게 된다. 보통의 순간들에서 좀 더 서로 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애써볼 이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모두가 나에게서도 느낄 수 있도록 나 또한 수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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