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행복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동생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간 날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동생인데 별안간 대학원에 가면서까지 공부를 하려니 힘에 부쳐하는 것 같아 만들어본 시간이었다. 동생은 길었던 10대의 방황을 끝낸 후 부모님의 추천으로 항공 분야를 전공했는데, 그런 그의 고민은 이러했다. 부모님의 제안이었을 언정 자신이 선택한 분야이니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 길의 끝에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있지 않다면 그 후회를 어떻게 감당해야 될지 벌써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자신은 항공정비, 도로교통법 보다 다양한 원두로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방법, 유튜브를 보면서 더 맛있는 요리 비법을 알게 될 때 더 행복하다고 했다. (실제로 꽤 소질이 있기도 하다.) 참 어려운 고민에 나는 교과서 같은 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나같이 평범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멋져 보이는 길인지 아냐며, 후회를 하려거든 그 길을 충분히 가본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고리타분한 말을 뱉었다. 아, 세월이란. 내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와, 나도 꼰대네'라는 사실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난생처음으로 플라워 클래스에 다녀왔는데 꽃을 내 마음대로 장식하면서 몰입하는 시간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작품 구상을 한 것에 비해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꽃으로 둘러싸인 구조물은 무조건 예뻤다. 클래스 강사님이 수강생 중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정식 플로리스트 과정을 준비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나보고 소질이 있다고 하진 않았지만 그 말에 솔깃해서 꽃집을 어디에 낼지까지도 고민하는 나였다.) 만약 내가 지금 직장을 그만두고 꽃집을 차린다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듣게 될 걸 알면서도 나는 분명 내 행복을 의심하는 매일보다 내 행복을 확신하는 매일을 살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그렇게 그날 오전에는 곧이곧대로(상상이긴 하지만) 나의 행복을 고집했으면서 그날 오후에는 동생에게 행복을 신중하게 좇기를 몇 번이고 당부했다. 아이러니했다.
행복은 얻기 쉬운 것이면서도 잃기 쉽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행복을 내 시간 속에 머무르게 하는 것보다 어렵고 공이 많이 드는 일이 없다. 어제는 이 세상이 끝나도 좋을 것 같이 행복이 가득했다가, 오늘은 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불행하게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행복하면 됐다.’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이고 그 순간의 목표는 행복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형체도 모를 행복을 좇는다. 그리하여 강박도 생긴다. 행복하지 못한 시간으로 불행을 정의하고, 그 불행으로 나 자신을 뒤덮기도 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과연 우리가 끊임없이 좇아야 하는 것인가, 아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다가와 주는 존재인 것인가. 나는 우연히 접한 취미생활 하나로 나의 불행보다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작 내 가족에게 행복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 의 불행은 잠시일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을 했단 말인가.
하루 종일 우중충한 날 잠깐의 볕이 드는 시간대에 ‘갑분쨍’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다. 다이어트를 위해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르겠을 식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모처럼만의 휴일을 맞아 밀가루를 과다섭취하는 동안 극도의 행복을 느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 그들의 단순하고도 복잡한 연애 스토리를 들으며 재미있어하는 내 모습에 행복을 느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행복해서 이 모든 순간들이 행복으로 정의되는 것인지, 아님 정말 이 순간 자체로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인지.
괜스레 동생에게 미안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