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나는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하다가 밀가루를 끊는 걸 떠올렸다. 내 얼굴에 붉은 알러지가 많이 나서 밀가루 음식을 줄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예 저녁부터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절대로 못 끊는다고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침에는 시리얼, 점심에는 빵이나 샌드위치, 저녁에는 소면을 말아먹을 정도로 엄청난 밀가루 포식자이었기 때문이다. 밥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면은 다양한 변신(ex. 소면- 비빔면, 잔치국수, 간장 국수)이 가능한 대신 밥은 먹는 반찬들이 정해져 있으니까 맛에 큰 변화가 없어 재밌지 않았다. 그런 빵순이인 내가 밀가루를 끊는 결심을 했다.
8월의 첫 월요일부터 밀가루를 안 먹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밀가루 음식이 금방 당길 거라 예상했던 때와 달리 3일이 지나도록 빵이나 면류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이만하면 한 달 금방 채울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며 다음 날 있는 가족 모임을 걱정했다. 6일 차에는 이모네 식구들과 워커힐 피자힐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곳이라 사이드 메뉴인 샐러드만 먹으려고 마음먹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모둠 피자와 랍스터 파스타를 본 순간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2주 차가 밝았다. 나는 피자힐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자장면의 유혹을 떨쳐내고 볶음밥만 먹었다. 떡만둣국을 먹을 때에도 만두피를 벗겨 만두소만 퍼먹곤 했다. 피자힐에서 밀가루를 먹은 사흘 뒤, 우리 가족은 석모도로 캠핑을 갔다. 글램핑장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소시지 빵과 과자를 간식으로 먹었다. 저녁에는 숯불고기를 구워 먹고 야식으로 짬뽕 라면을 끓여 먹었다. 뜨거운 불 옆에서 생고기를 열심히 구운 나머지 과로로 나는 응급실에 실려가 일주일간 매스꺼움에 시달려 미음과 죽만 먹을 수 있었다.
3주 차 화요일에는 엄마에게 부탁해 타코를 배달시켰다. 생각해보니 타코의 난도 밀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난을 빼고 그 위에 있는 토핑만 집어 먹을까 고민하다 시원하게 한 입을 배 어물 었다. 밥이 물리게 되고 면이 그리워질 때쯤, 나는 묘안을 떠올려야 했다. 이제 비빔밥은 질렸고 미역국이나 뭇국의 기름 냄새조차 진저리가 났다. 생각해보니 햄이나 베이컨은 우리 가족의 식재료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자극적인 맛을 원했고, 엄마에게 졸라 햄과 베이컨을 샀다. 평소에는 엄마가 가공육을 사주지 않았는데 이것마저 없으면 미션을 실패할 것 같아 햄을 산 뒤 바로 스팸 마요 덮밥을 해 먹었다.
엄마는 이 프로젝트를 실행한 이후 내 피부가 밝아지고 붉게 올라온 뾰루지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나는 뛰어난 효과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뽀얗게 보이는 것 같다. 제대로 씻고 자지도 않았는데 피부 상태가 예전보다 나아졌다. 4주 차에는 햄과 베이컨으로 식빵이 없는 브런치와 스팸 구이를 즐겨먹었다. 다이어리에 적으면서 밀가루 음식을 먹은 횟수를 비교하니 나는 한 주에 한 번씩은 꼭 밀가루로 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나에게 선물을 주자는 의미로 한주에 한 번은 프리 하게 밀가루를 먹는 밀가루 데이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주로 수요일이나 화요일에 먹곤 했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컵라면과 점심에 샤보텐 돈가스 정식, 야식으로 생라면을 부수어먹었다. 삼시 세 끼를 밀가루로 이루어진 음식만을 섭취했다.
8월에서 9월로 넘어가는 5주 차에는 습관을 아예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의 나는 새벽 5시경에 자서 오후 3,4시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지만 아침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정상적인 수면 패턴으로 돌아갔다. 설렁탕과 김치볶음밥, 다음날에는 회덮밥, 불고기덮밥과 해물뚝배기 등 메뉴를 다양하게 골랐다. 9월 1일에는 내 사이버대학 강의 오픈날과 겹치면서 뿌링클 치킨, 강정치킨을 개강 선물로 시켜 먹었다. 엄마 아빠는 대학 입학 기념 케이크를 사 와서 다 같이 축하송을 부르며 케이크를 잘라먹었다. 달달한 생크림 케이크의 여운이 남아나는 다음날에도 케이크를 먹고 싶었다. 나는 아침부터 엄마에게 토마토 스파게티를 끓어달라고 해 점심까지 남은 스파게티를 먹어치웠다.
<한 달 동안 밀가루 타파 프로젝트>를 실천해보니, 내가 좋아하고 즐겨먹던 음식들이 주로 밀가루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파트 앞 베이커리에서 사 온 갓 나온 따끈따끈한 빵들, 야식으로 후딱 먹어치우던 비빔소면과 컵라면, 피자와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에는 당연하고 만둣국에도, 밀떡볶이에도 밀가루가 들어가 있었다. 한 번은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며 월드콘을 먹다가 콘이 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닫고 뒤늦은 후회를 한 적도 있었다. 이걸 계기로 나는 반 강제적으로 한식을 먹어야 됐는데, 배달앱으로 도시락을 골고루 시켜 먹으면 많은 어려움 없이 맛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여러 반찬(오징어채, 멸치볶음, 오이무침 등)과 주된 요리(불고기, 생선구이, 계란 프라이, 김치찌개)만 바뀌면 다른 요리를 먹는 것처럼 색다르게 먹을 수 있었다.
2020년 1월부터 심심풀이로 다이어리에 그날 내가 먹은 음식들을 적었는데, 밀가루를 안 먹는 날이 손에 꼽혔다. 하지만 지난 8월 달력을 보면 완전히 변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한순간에 아침에 샌드위치를 먹는 식습관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나는 빵을 딱 한 번밖에 먹지 않았다.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아서 일 수 도 있고, 내가 중간중간에 밀가루 음식을 섭취해서 일수도 있지만, 금단현상처럼 그것들이 처절히 고프지는 않았다. 또, 식습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내 생활 패턴도 바뀌기 시작했다. 새벽에 자서 오후에 일어나는 습관은 아침에 밥을 챙겨 먹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개선됐고, 샐러드나 과일 같이 건강한 식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 여정을 될 수 있는 한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