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 글을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고 2021년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2021년이 다가워질수록 올해를 헌신짝처럼 소홀히 보냈다는 것이 실감 났다. 허기진 마음을 달래려고 나는 9월부터 사이버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청하고, 그림 그리기도 다시 시작했다. 그 후로 감정은 항상 '보통'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았고, 머릿속이 복잡하지도,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지도 않아졌다. 하지만 왜일까, 마음 한 켠이 공허해지는 건.
흰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날이 자꾸만 생각났다. 2020년이 되기 전에 나는 일 년 치 분량의 백과사전 두께의 다이어리를 사서 맨 앞장에 이번년도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다. '한 해의 바람'들을 소원했던 한 페이지는 코로나가 터지고 족족 무산되면서 죄책감처럼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3개월도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책꽂이에 처박아뒀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내가 적은 검은색 글씨로 된 24개의 목표 위에는 아무런 체크 표시도, 동그라미 무늬도 보이지 않았다. 한 줄 한 줄을 읽어내리며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열아홉 번째에 '글 배우기'라는 글이 보였다. 나는 얼굴이 환해지며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엄마에게 "엄마, 그래도 하나는 했어! 나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글 배우고 있잖아!"라며 밝게 얘기했다. 두 칸 아래에는 '피아노 새로운 곡'이 눈에 들어왔다. '헉, 나 몇 개월 전에 clair de lune 악보 두 페이지나 외워서 쳤었잖아!' 지난날의 추억과 메모리들이 기억 속에서 한꺼번에 동시 상영됐다.
2020년 한 해의 바람
그러고 보니 올해는 특히 도전했던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3년 전부터 붙잡고 있었던 초고(40 꼭지 모두)를 드디어 완성했고, 사이버 대학교에도 입학했다. 지금은 손이 굳어버렸지만 clair de lune 이 한 곡을 치기 위해 하루에 3시간도 넘게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은 날도 있었다. 1년 전에 유화 물감 도구를 사놓은 게 아까워서 일주일 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한 달 프로젝트(밀가루 끊기, 일기 매일 쓰기, 책 매일 읽기)도 진행하면서 중간에 못했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100%가 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완수하고 나면 밤이 오는 게 두렵지 않다는 걸 조금씩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세수와 양치질을 한 뒤,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이완시키고 침대에 앉는다. 리모컨으로 천정 등을 소등하고 노란색 빛이 나는 스탠드를 켜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나 느꼈던 감정들, 생각들을 적고 일기장을 덮는다. 머릿속 스위치를 끄는 것처럼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스탠드의 불도 꺼진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오며 침대에 눕는다. 천장에 별들로 가득한 우주 속을 헤엄치는 돌고래들이 분수를 뿜어내고 있다. 기분이 무척 뿌듯해지며 '행복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더 이상 내일이 오는 게 무섭지 않다.
나는 행복도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웠다.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있고, 밤늦게까지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게 나의 행복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내 할 일들을 미룬 채 시간을 축내다 보면, 오늘을 잘 보내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새벽까지 유튜브만 들여보다 눈이 피로해질 때까지 참곤 했다. 하지만 현실을 잊기 위해 도피성으로 찾은 인터넷은 전혀 도움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마쳤을 때,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를 하며 운동이나 독서 등을 해야 내가 나를 잘 대했다는 걸 느꼈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그것들이 곧 내가 나를 존중해주고 있었던 증거였던 것이다.
24개의 목록 중 체크 표시해놓은 '7. 술 마시기', '13. 아무 곳이나 여행', '17. 지식 습득', '19. 글 배우기', '21. 피아노 새로운 곡'을 뺀 나머지 열아홉 가지는 코로나로 인한 상황 때문에 올해 안에 마치기가 힘들 것 같다. 대부분이 바깥에서 하는 활동(설산 등반, 한강 피크닉, 19금 영화 관람, 전시회장 가기 등)이기에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추려보았다. 그중 '그림 배우기'는 클래스 101 같은 온라인 강의를 신청해서 들으면 될 것 같고, '염색하기'은 셀프 염색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 henry_be, 출처 Unsplash
나는 이번년도가 가기 전에 '끝내고 픈 일'들을 새롭게 적어보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로 그림용 인스타를 만들 것이다. 그림만을 위한 창작을 기록해줄 공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온라인으로 그림을 배워서 조금씩 그림을 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제8회 브런치북 프로젝트 기한에 맞춰 브런치북을 내고, 세 번째로는 기말고사 대비 웹소설 스토리를 짜 볼 것이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네 번째로 새로운 에세이를 위한 목차를 정리하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매거진에 글을 많이 올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201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나는 짧은 일기를 하나 썼다.
스무 살이 된다는 것. 나는 스무 살이 되면 내 인생이 멋지게 바뀌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난 왜 이리도 울었을까. 분해서? 억울해서? 노오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속 도전해왔었다.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신세로 남게 되었지만! 20대, 30대, 40대가 되어도 바뀌지 않을 내가 두렵다. 아니, 혹은 더 나빠진다면? 내가 과연 스무 살을 잘 보낼 수 있을까? 이제야 겨우 숨 좀 쉬게 되었는데, 다시 저 깊은 심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난 계속 기대를 하게 되니까. 나의 내년, 내후년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하며, 그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2020년 봄까지만 해도 밖에 마음 편히 나갈 수 없는 날이 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추석이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올 때까지 코로나가 득실거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정말 아무것도(는 아니지만 체감상) 하지 못할 줄 알았겠는가. 한강에서 피크닉도 해보고 사람 많은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도 보고, 조용하게 전시관에서 그림을 관람하는 스무 살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돌아온 것은 집 안에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고, 무언가 계속 시도하고 노력해봐도 마음 한쪽이 공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마음 놓고 가족들과 함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다섯 개의 '끝내고픈 일'들을 마무리 지어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