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지 않는 병뚜껑
폐동맥고혈압 진단을 받은 후 달리진 행동 중 하나는 쉽게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생수병이었는데, 나는 유독 통조림 뚜껑이나 병뚜껑 같은 걸 따기 어려워했다. 무슨 순정만화에 나오는 갸냘픈 여주인공도 아닌데 말이다. 때때로 내가 이 쉬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나 열리지 않는 생수병을 집어 던졌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백마 탄 남주인공처럼 다가와 생수병 뚜껑을 손쉽게 열어 주었다. 만화처럼 후광이 뒤에 비치지는 않았다. 나는 도움이 필요없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 위풍당당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짜증나. 왜 안되지?' 반복되는 실패에 나는 뚜껑을 딸 시도조차 하지 않고 바로 엄마한테 생수 병을 주었다.
어느 날 엄마는 평소에 삼다수 대신 마시려며 '피지FIJI'라는 수입 생수를 사줬다. 그 생수병은 친환경 포장용기를 써서 환경 호르몬이 배출되지 않았다. 맛은 삼다수 물이랑 비슷했지만, 문제는 뚜껑이었다. 뚜껑의 봉합부분이 삼다수 물병보다 더 강하게 붙어있어 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손바닥이 얼얼해진 나는 1초도 안돼 바로 물병을 내려놓았다. 내게 '피지'는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내가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은 또 있었다. 바로 가파른 언덕과 계단이었다.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오를 수 없는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걸어갈 수 있지만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해서 헉헉대는 숨과 세상이 핑 도는 기분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굳이 내가 이 기분을 느끼면서까지 돌아다녀야 하나 자괴감이 들면서 외부 활동에 관심이 없어졌다. 나는 병원 갈 때 를 빼고는 거의 집안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체력은 당연히 줄어들고 계단이나 언덕을 마주치면 고통스러운 미래가 먼저 생각났다.
상담선생님이 말하기를,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과 제약이 있어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했다. 나는 굳이 달릴 필요가 없어서 안 달리는 게 아니라 못 달리는 것이었다. 분명 내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산을 오르고 가끔씩 뛰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 그 본능은 사실이 아닌 양 내 마음을 속여왔다. '편히 걸을 수도 없는 몸을 가졌으면서 뛰는 걸 바라는 건 너무 사치 아닌가? 야, 뛰긴 뭘 뛰어. 밖에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몇 미터 안 되는 거리를 달려서 심장이 미칠 듯이 숨이 막혀오는 것보다 뛰지 않고 내 속내를 나조차 모르게 숨기는 게 편하다는 걸. 나도 모르게 '이 정도는 가능해. 이거는 좀 위험한데?'하며 미리 데드라인을 정해 놓은건 아닐까?
짧은 거리를 걸어도 얼마 안가 주저 앉았다. 뛴다는 것은 옛말. 걷는 것조차 무서운 내게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생과 사를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산 밑에 도착해서 산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저기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기 보다 산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에만 있으면 편한데 왜 사서 고생을 해.' 나는 조금씩 거리를 늘려고 노력하기보다 미리서 내 가능성을 재단해버렸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걸을 수 없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이제 뛰지 않은 지 5년이 훌쩍 지났다. 밖에 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 가벼운 뜀뛰기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내 심장은 달리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내 머리는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3초도 안되서 헉헉대고 눈앞이 어지러운 걸 아는 데 굳이 힘들게 뛸 필요가 있을까?'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학생들을 봐도 하하호호 웃으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을 봐도 내 뇌는 흥미와 욕구를 차단했다. '죽을만큼 달리고 싶을 때 달려야 하는거야. 그게 아니면 달릴 필요가 없어.'
숨이 조금이라도 차오르는 게 느껴지는 게 싫어서 안간힘을 써야되는 장소를 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자연스레 도전하려던 발걸음은 멈춰지고, 계단과 길 곳곳이 저승 길 같았다. '내가 저 길을 꼭 가야할까?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다시 힘들어질 거. 어차피 안될 거. 안되니까. 원래부터 못하는 거였으니까. 뚜껑을 따려다 생수병을 세게 내리치면서 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