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궤도에 들어섰습니다."
차트 기록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의사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은 마냥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째려봤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로 뻥치시면 안돼요.'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혈액 검사 결과는 정상 궤도에 들어갔으나 다시 나빠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지켜보고, 다음 진료 때 한번 더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뒤돌아 보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감정의 파도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졌다니!' 믿을 수 없던 나는 의사에게 되물었다. " 진짜 좋아졌나요?" 의사한테서 확답을 받자 나는 엄마와 아빠를 얼싸 안으며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거짓이었을까. 차라리 의학 드라마에서처럼 주저앉으며 울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들은 생각은 의심이었다. 눈물은 맺히지도 않았다. 진료실 안에서 나오고 병원 밖을 벗어나서도 꿈 속에 있는 듯 몽롱했다. '내가 나아졌다니? 그럴리가 없어, 그럴 일은 없는데.'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이렇게 낫는다고? 5년을 고통 속에서 헤엄쳤는데, 왜 하필 지금이야?' 행동에 제한있는 삶이 이제야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조물주는 또 다른 삶을 요구했다. '소설도 이렇게 쓰면 개연성이 없다고 하겠다.' 예상치 못하게 '상태가 좋아졌다'는 결과를 받은 나는 평생을 물가에서 살아온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물 밖으로 나오는 생태계같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상궤도로 들어갔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엄마와 아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는 매일 3시간마다 꼬박꼬박 네뷸라이저를 한 게 도움되었을 것이라며 원인을 짐작했다. 나는 외계인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내 삶에 희귀병이 없어진다니. 아니 없어질 수도 있다니.' 분명 그토록 원하던 말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사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고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영화 <트루먼 쇼>같이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폐동맥고혈압 환자 곽시우에서 그냥 '곽시우'로 산다는 건 이름을 바꾸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창시절내내 같이 다녔던 친구를 이제와서 헤어질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처럼 난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좀 열심히 할 걸.' 중고등학교 시절의 아픔이 지금과는 다르게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를 했다. '누가 좋아질 줄 알았겠어. 스무살 되기 전에 죽는 줄 알았잖아.' 연세대 병원에서 의사가 희귀병이 나아진 한 대학생 얘기를 해준 날이 떠올랐다. 그 대학생은 병이 생기고 학교를 안 간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폐고혈압이 나았으니까 하는 소리겠지. 경과가 좋지 않은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런데 내가 딱 그 꼴이 되어버렸다.
그 말을 듣고도 난 쉽게 희망을 가지기 어려웠다. 이대로 좋아졌구나 철썩 믿으면 편하겠지만, 몇년 동안 계속 나빠지기만 했던 내 병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걸 들었을 때 갖게 된 생각은 검사가 잘못되었거나, 완치가 되지 않는 이상 나중에 다시 나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래 모르는 거잖아. 기뻐하지 말자. 기대도 하지 말자.'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희망을 갖기보다 회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희망을 품다 생길 절망감은 더욱 버티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체득했으니까. '이대로 좋아지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삶은 계속 희망을 갖게 하는 걸까.' 쉽게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 의아했다.
3개월이 지난 겨울에 우리 가족과 나는 다시 서울대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았다. '악화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지?' 진료실에 들어가기를 앞두고 두려웠던 나는 손톱을 계속해서 물어뜯었다. 간호사님이 내 이름을 부르자 초조함에 다리를 덜덜 떨었다. 앞서 진료를 받던 사람이 나오고, 내가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의사선생님은 이번에도 시크함을 유지했다. 검사 결과를 얘기하자 나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도 상태가 안정됐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안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온 나는 엄마와 아빠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실감했다. '정말로 좋아진게 맞구나.' 나는 엄마, 아빠를 부둥켜 안고 한참 동안 울었다.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