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고?

by 오뉴월의 뉸슬

'시간이 약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문장이었다. 이 말은 자기개발서나 좋은 글귀 같은 플랫폼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항상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얘기했지만 그 시간이 흐르면 나는 이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까라 그래.' 내 상태를 알지도 모르면서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오히려 더 상처가 되었다. '나는 지금 당장 힘든데, 자꾸만 내일 모래를 생각하라고 하네.' 방을 정리하면서 전부 폐기 처리 된 자기개발서처럼 듣기 좋은 말들은 나에게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시간은 정말 약이었다. 그러니까 망각의 의미로. 그리고 시간은 약이 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나는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시간은 나의 아픔과 상처들을 거짓말처럼 조금씩 '해결'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약보다는 망각에 가까웠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중 기억을 지워버린 두 연인처럼 모조리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미세먼지가 자욱한 회색빛 하늘처럼 흐릿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조각난 회색빛 기억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가 후였나, 전이었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망각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실험은 성공적인 것일까.


그러나 시간은 아픔 속에 빠져있던 나를 심연에서 나올 수있게 도와주었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을 기억하기보다 감정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 거 아니었던 일도 격앙되게 생각하였고 내 모든 순간들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어떤 때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났었는 지도 몰랐다. 시간도 약처럼 내 병과 아픔을 모두 낫게 하지는 못했다.






시간은 그저 내 슬픔들을 누르고 또 누르기만 했다. 가끔씩 수면 위로 떠오른 격한 감정들은 커다란 흉터를 남기고 돌아갔다.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사건들을 기억창고에서 끄집어 내기라도 하면,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 순간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억지로 감정들을 차단시키고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흐르기만 했을 뿐, 눈물과 고통을 참고 있었던 나는 마치 시간이 해결해준 것처럼 사건을 꾸몄던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때는 그랬었지.'하며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절대 추억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나도 모르게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2년 전 부터 나는 내 불행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서 좀 더 내 감정에 솔직해졌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고통은 남아있다. 고통은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른다. 흉터 위에 새로운 상처가 날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듯이 아픔을 덮지만 말고 약을 써야 할 차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