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시한부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by 오뉴월의 뉸슬

"너 시한부야?"


쉬는 시간에 짝궁이 물었다. 한 번도 친구들한테 병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어보지 않았던 나는 엉뚱한 질문에 곤란해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말 꺼내기를 망설이자,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준호(가명)는 느닷없이 영수(가명)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며 화를 냈다. 두 남자애들의 말다툼은 금세 싸움으로 번졌다. 내 병에 대해 알고 있던 준호는 영수의 표현이 악담으로 느껴진 것 같았다. 정확한 병명을 알고 있던 준호와 달리 영수는 담임선생님한테 내가 아프다는 얘기만 들었을 것이다. 내가 자주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몸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한 영수는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둘의 언쟁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준호가 생각외로 심하게 격분하자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인지한 영수는 나에게 사과했다.


종이 울리고 수업시간이 되자 영수는 내 옆자리에 쭈뼛하게 앉았다. 나와 영수 사이의 분위기는 머쓱해졌다. 영수는 미안한지 나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 '진짜 괜찮은데.' 시한부라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어본 적 없었던 나는 기분이 상하기보다 당황했다. '다른 친구들이 나를 시한부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심 학교를 자주 결석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했었던 나는 내가 없는곳에서 뒷담화하는 애들보다 영수같이 솔직하게 질문하는 친구가 오히려 고마웠다.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나는 준호가 영수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를 위해 준호가 나서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라는 외딴섬에서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화 내주고 기꺼이 싸워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시한부라는 말이 상처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시한부 환자의 삶이 내 투병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상황 다 죽음을 알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유사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 모습을 떠올리자 문득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났다. 소설 내용 중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의사 말을 들은 주인공 존시는 담쟁이 덩쿨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며 좌절했다. 나는 책을 읽고 마지막 잎새를 지켜보며 병상에 누워있는 시한부 삶을 연상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시한부 환자들은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믿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채플런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저자 케리 이건은 책 <살아요On Living>에서 이런 말을 했다. "흔히들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특별하고, 현명하며, 삶을 통달했거나 심지어 섬뜩한 존재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건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죽어가는 사람도 당신과 나처럼 보통 사람이며,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곧 하게 될 사람일 뿐이다. '죽다'라는 말은 '뛰다'나 '먹다', '웃다'처럼 단어일 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아직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하고 있을 뿐이다." 난치병이 있는 나도 죽음만을 생각하고 우울해하며 슬퍼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시한부 환자는 나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행복해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거나, 화를 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고,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출처: Chakras Activated



그러나 '죽는다''죽을 수 있다'의 문장은 달랐다.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고, 1초 뒤의 미래에 죽을 수도 있다. '갑자기 호흡곤란이 와 죽으면 어떡하지? 실신하다가 머리를 부딪혀 뇌상을 입으면 어떡하지? 하지 못한게 산더미 같은 데.' 나는 내가 세상에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하고 있던 일을 끝맺지 못하고 죽을까 봐 걱정했다. 이승을 맴도는 귀신이 되어서 평생 후회하며 살까 봐 매순간 초조했다. 책을 출판하지 못할까봐, 엄마 아빠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버릴까봐, 내가 이 세상에서 돌연히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동물원의 철장처럼 나는 언제 어디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옭아매였다.


영화<이웃집에 신이 산다면>처럼 나는 내 남은 수명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내가 언제 죽을 지 알면 죽을 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항상 긴장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죽는 날짜를 알 수 없다는 건 내가 며칠, 몇 년 혹은 몇 십년을 더 살 수 있을 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고, 엄마 아빠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다.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내일은 죽지 않겠지.'하며 희망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그게 내일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죽어가고 있다. 살아간다는 말을 바꿔 말하면 죽어간다는 말이다. 팩트는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인생은 무한하지 않다. 네이버 2018년도 기준 기대 수명으로 보면 여자는 85.7세, 남자는 79.7세로 평균 82.7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신기한 건 9년 사이에 2년밖에 수명이 늘지 않았다. 삶이 유한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숫자로 밝혀진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남은 삶을 위해 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지금의 삶이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가?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며 많은 질문들을 남겼지만,


오늘도 역시, 나는 살아가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