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by 오뉴월의 뉸슬

정상 궤도 판정을 받은 후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생각과 달리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화 속 얘기처럼 주문을 외우면 남루한 옷도 눈부신 드레스로 만들어지듯이,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내 삶도 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무서워하고, 계단 올라가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여전히 대중목욕탕에 들어가지 못했고,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고, 산을 등반할 생각조차 못했다. 뼛속까지 새겨진 공포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병세가 좋아졌다고 해서 내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나아졌다는 말을 듣기 전과 똑같았고,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다.


작년 8월 급체로 응급실에 실려간 이후 나는 밥을 못 먹게 되었다. 밥알이 혀에 닿는 느낌이 끔찍했고, 밥알 하나하나가 작은 유충처럼 느껴졌다. 삼키기라도 하면 알에서 깨어난 벌레들이 기어 나와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밥을 보기만 해도 앰뷸런스 안에서 구토를 할 때 밥알이 목에 걸리면서 괴로웠던 경험이 떠올랐다. 먹지 않아도 밥알이 생선 가시같이 입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났다. 밥을 먹으려고 시도해봐도 흰 밥이 눈 앞에 있으면 두려움이 앞섰다. 밥을 먹는 게 무서워진 나는 점점 더 메말라갔다.


몇 달 동안 나는 밥에 손도 대지 않았다. 괴물을 본 것처럼 밥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고, 나에게 밥은 더 이상 주식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주식은 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밥은 상당히 많은 음식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초밥에도 밥이 들어있었고, 오므라이스에도 밥이 들어가 있었다. 밥을 못 먹는 나는 된장국이나 콩나물, 시금치나물 같은 반찬거리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와 같이 저녁을 먹을 때면, 나는 식탁에 놓인 국의 건더기만 떠먹었다. 계속해서 밥을 먹지 못하자 엄마는 잔치국수나 비빔국수를 해줬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까 봐 부담스러웠던 나는 저녁시간에 식탁에 앉지 않고 굶기 시작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자 엄마는 속상해했다.


저녁을 굶는 패턴이 계속되자, 내 몸무게는 3킬로그램이나 빠져 42킬로가 되었다. 나는 영양부족으로 손이 덜덜 떨려오기 일수였고, 심장은 예전처럼 변화무쌍하게 아파왔다. 이대로 저녁밥을 먹지 않는다면 쓰러질 것 같았던 나는 밥을 먹는 연습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밥 한 톨만을 꼭꼭 씹어먹었다. 원래 나는 밥을 젓가락으로 조금씩 먹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작은 몇 톨씩 먹게 되었다. 계속 시도를 해나가니 나는 맨밥과 달리 김밥이나 돈가스에 들어있는 밥은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마저도 김에 붙어있는 밥을 덜어내고 먹어야 했지만, 밥이 주식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는 점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김밥을 먹다 또 체했다. 나는 급체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평생 밥을 먹지 않고 살겠다며 다짐했다. 며칠 동안 공들인 노력은 금세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내 몸은 이미 국수나 라면 같은 면 종류에 적응이 된 건지, 한동안 밥을 안 먹다가 갑자기 밥을 먹게 되면 소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밥이랑 맞는 건가?' 하지만 국수를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먹으니 물리기 시작했다. 짜파게티, 짬뽕 라면, 스파게티, 열무김치말이 국수 등 면 종류에도 한계가 있었다.




6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다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면에 질린 나는 계란이 보슬보슬 덮여있는 오므라이스와 날치알이 오독오독 씹히는 알밥을 먹고 싶었다. 나는 죽기 전에 먹는 마지막 만찬처럼 응급실에 실려가도 된다는 마음으로 한꺼번에 두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밥 한 톨을 녹여 먹을 때처럼 젓가락으로 오므라이스를 휘졌지 않고, 바로 숟가락으로 크게 한 숟가락을 떠서 먹었다. 짭조름한 붉은 소스에 촉촉하게 젖은 밥알이 계란에 감싸져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면서 밥알 하나하나에서 쌀밥 특유의 달달함과 감칠맛이 느껴졌다. '이런 말로만 듣던 지은 밥맛인가?' 한 번도 밥을 먹어보면서 느껴보지 못한 맛에 충격이 일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탄수화물을 끊는다고 하는구나.' 밥만 먹었을 뿐인데 진수성찬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거나 삼계탕에 들어있는 흰 밥은 못 먹지만 밥의 참 맛을 안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밥을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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