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망했던 회사의 몰락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온 지 반년정도 된 전 회사인데, 아직 회사가 청산 된 것은 아니니 망해가는 중이 알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티끌만큼 있던 복지는 다 사라지고 연봉은 동결되었으며 희망퇴직이 시행되었고 남은 인력들도 언제 나갈지 타이밍만 재고 있는 상황이니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이 없다.
전 회사는 그래도 한때 신사업을 이끌며 나름 장래가 유망한 것으로 평가되던 회사였다. 성과가 좋던 중소기업을 대기업이 인수하며 단기간에 급격히 성장한 회사였는데(나도 그 과정에서 입사했다.) 나를 포함한 경력직들 모두 그 업계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으쌰으쌰 하며 힘 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입사했던 시점에 회사 주가도 최고치를 찍었었고(지금은 그때의 5분의 1로 쪼그라든 상태다.) 신제품도 적극 기획, 개발하며 다들 앞으로의 성장세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회사는 인수 된 햇수를 한 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망해가는 회사가 됐다.(이 문제들은 다른 글에서 다뤄보고 싶다.)
희망퇴직 전에도 회사 상태가 좋지 않음을 실감한 사람들의 줄퇴사가 이어지고 있었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남은 사람들에게 빨리 기회를 찾으라고 해도 듣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다들 회사에 대한 문제와 불안감은 느끼고 있었으나 가시화된 문제는 없었으니까. 조금만 버티면 턴어라운드 할거라고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1. 인재 유출로 인해 업무를 수행할 인력이 줄어듦
- 희망퇴직 전 회사가 이상해서 줄퇴사가 이어질 시점 가장 먼저 나간 건 S, A급 인재들이었다.(당연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치가 있으니) 백그라운드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실제 실무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떠나가기 시작했다. 백그라운드만 좋고 별 능력 없는 사람들은 이때 나가지 않았는데, 이 회사에 오면서 백그라운드가 좋다는 이유로 연봉을 굉장히 올려 받았고 다른 데 가자니 애매하니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나가지 않았고 쓸데 없이 헤드카운트만 잡아 먹기만 했다. 당연히 해결되지 않는 일은 쌓여가고 일정 지연은 일상이 됐다.
2. 커리어 유지가 어려워 질 수 있음
- 1번과 맥을 같이 하는 문제인데, 일은 그대로고 인력은 줄어드는데 회사의 재무 상황이 나쁘니 당연히 신규 채용은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업무 공백을 채우기 위한 의미없는 조직개편이 난무했다. 자연스레 남은 사람들이 퇴사자의 몫을 나눠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본인 커리어패스와 전혀 맞지 않는 일을 떠맡는 사람도 많아졌다. 평생 처음해보는 직무에 갑자기 배치된 것도 혼란스러운데 그 조직에 특히 리더까지 부재한 경우가 있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3. 사기 저하와 불신 팽배
- 줄퇴사가 이어지고 희망퇴직이 시행되고 매각설이 돌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업무 집중이 될리 만무하다. 업무 시간 미준수, 근무 태만 같은 근태 불성실자가 늘어났고 부서 간 사이도 굉장히 나빠져 서로를 탓하고 헐뜯기 바쁜 문화가 확산됐다. 특정인/부서를 향한 근거 없는 소문이나 뒷담화가 만연하고 날이 갈 수록 심해져 블라인드에 실명을 거론하는 비난글까지 종종 올라올 정도였다.
4. 채용 시장에 부정적 인식 확산
- 희망퇴직을 기점으로 채용 시장에 부정적인 소문이 퍼진건지 헤드헌터로부터 연락도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이직처를 구하지 않고 나갔던 사람들이 공백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호소했다. 퇴사하지 않고 이직 준비 하던 사람들도 서류 전형 통과마저 쉽지 않음에 좌절했다. 내가 퇴사할 때만 해도 동종업계로 취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정상적인 퇴사 프로세스를 밟을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 동의서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5. 패배자 마인드의 전염
- 위의 이유들로 회사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나며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패배자 마인드가 강해졌다. 긍정적이고 성실한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패배자 마인드에 물들기 시작했다. 노력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사람도 적극적으로 이직처를 알아보지 않거나 이직 준비는 차차 하겠다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상황으로 나도 이 회사를 떠나오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때 같이 열심히 했던 사람들은 남아있기에 그래도 회사가 위기를 잘 극복하고 성장하길 바랬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이직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월급은 아직 나오고 있고 대기업 타이틀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니 근무기간을 좀더 채우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애매한 회사로 이직하느니 여기 남는 게 낫다고 판단한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실상 떨어진거나 다름 없는 대기업 타이틀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고 내가 더 성취할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배울 것도 없어진 상황에서 근무기간만 채우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더 버텨봐야 정신적인 타격만 커질 뿐이다. 사실 나는 돈이나 매각 이슈 같은 거 보다 이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망가지고 나면 더더욱 정상적인 판단도 어렵고 좋은 기회를 찾기 어려워 진다.
블랙기업이든 어디든 아무 데서나 일할 것이 아니라 그래도 자신만의 커리어패스를 성장시켜 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회사가 망해가는 조짐이 보일 때, 플랜B를 적극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