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없는 누수의 축복이 내리네
이사 전 누수와 곰팡이 환장 대파티를 겪은지 채 1년이 안 되어 또 누수가 생겼다.
날씨가 따뜻했던 5월 말. 내가 원래 새벽에 잘 깨는 편은 아닌데 어느날 갑자기 새벽 2시에 눈이 떠졌다. 이상하게도 다시 잠이 안와서 뒤척이는 데, 갑자기 부엌에서 투다다다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부엌으로 가보니 화재감지기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급하게 대야를 받쳐두고 아침에 관리실에 전화 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애써 잠에 들었다.(21세기에 집에 대야 받치고 사는 삶...)
아침에 일어나니 벽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관리실에 전화해 몇 동 몇 호라고 하자 담당자 아저씨가 누수 때문에 전화하셨죠?하고 되묻는거다. 알고보니 옥상에서 누수가 발생해서 우리 라인 전 세대가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일단 젖은 곳이 말라야 보수가 가능하다며 잘 말려보라고 하셨다.
이사 오기 전부터 누수가 있던 집이라 혹시 살면서 또 누수가 생길까 가끔 걱정이 되었었는데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서울에는 하도 구축 아파트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봤을 때 누수 피해 겪은 사람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 중에 심각하게 누수 피해 겪은 언니가 있었는데,(윗집 문제였는데 해결을 안해줘서 소송까지 갔는데 갑자기 집을 팔고 날랐다고 했다.) 실크벽지는 안쪽이 비닐이라 공기가 안 통해서 물이 심각하게 차고 곰팡이가 심하게 번졌었다며 치를 떨었었다. 그래서 나도 인테리어 자재 고를 때 합지 벽지를 해야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그래도 실크벽지가 더 고급스러워 보여 실크로 골랐다가 이번 누수에 크게 후회했다.
관리실에 언제 보수 가능하냐 물었는데,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다고 해서 좌절했다. 곧 장마가 올텐데, 그러면 또 벽이 잘 안 말라 공사가 어려울거고 그럼 나는 가을이나 되어야 보수 받을 수 있는 걸까 하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곰팡이가 더 번지기 전에 뜯고 벽을 말릴까 물어봤지만 관리실에서는 일단 두라고 했는데, 매일 번져가는 곰팡이를 보며 하루 종일 제습기를 돌리는 데 정말 우울했다. 인테리어 한지 1년도 안되어 이런 일이 생기니 속상할 따름이었다.
나만 이렇게 답답한건지 윗집에 물어보기도 했지만 윗집은 오히려 태연하게 반응했다. 관리실에 전화도 여러 번 하고 입주민 단톡방에 하소연 하기도 하며 한 달 쯤 지났을 때 아파트 상가 인테리어 업체에서 보수 공사로 연락이 왔다.
해준다고 할 때 안 받으면 진짜 더 노답될거 같아서 내가 최대한 날짜를 맞추겠다, 곰팡이 제거는 내가 하겠다고 하며 도배라도 원래 벽지랑 같은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리 곰팡이 제거를 해두겠다고 하자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이 벽지를 뜯으셨는데, 심각할 것은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 더더욱 곰팡이 상태가 심각했다. 통풍이 안 되는 실크벽지 뒤에서 곰팡이들이 파티를 열고 있었다.
(아주 럭키비키하게도 한 달도 전에 잡아둔 건강검진일 쯤 맞춰서 보수공사 연락이 와서, 오전에 급히 병원에서 검진 받고 오후 시간은 자유라 인테리어 업체도 만나고 곰팡이 제거 작업도 가능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스칼프가 그렇게 짱이라고 해서 주문을 해놨는데, 배송 오기도 전에 벽지부터 뜯겨서 곰팡이랑 같이 살아야 하나 걱정하던 중에 업체 사장님이 곰팡이 제거제를 빌려주셨다.
급하게 근처 철물점에서 브러쉬를 사와서 곰팡이 제거제를 바르자 생각보다 아주 쉽게 곰팡이가 제거되기 시작했다.
스칼프는 지금 배송 중인데 오자마자 바로 반품 행이다. 그래도 이제 슬슬 마무리 되어 가는 것 같아 마음은 좀 편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걸까 싶기도 하고 독립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