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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미기miggie Dec 15. 2018

브루노의 죽음이 먹먹한 이유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읽고

 이 책은 세계 2차 대전 중 일어난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는 9살짜리 어린 아이,브루노 중심으로 전개된다. 독일 수령관의 아들인 브루노는 베를린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사를 가게 된다. 브루노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농장’이라고 말하는 브루노의 시선은 신선했다. 고통 받는 피해자들이 중심이 된 전쟁 관련 책이나 영화는 많이 봐왔지만 가해자의 아들이 주인공이 된 경우는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에 표현된 학살의 잔인함과 공포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지만, 그 모순 때문에 끔찍했던 그 시대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책 속에는 전쟁의 현실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스며들어있다. 출구가 없는 유태인용 기차, 자신은 원래 의사였다던 시중 드는 웨이터, 잔인한 코틀러 중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끔찍한 풍경, 자책어린 브루노 할머니의 호통, 가정환경과 역사 세뇌 교육으로 변해가는 누나의 모습 등...... 자극적인 묘사는 없지만 책의 모든 부분이 그 때 그 시절을 처연하게 외치고 있다. 오직 브루노만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밝고 천진난만하다. 탐험을 좋아하는 브루노는 창 밖 멀리로 보이던 농장, 그러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까지 가게 되고 철장을 사이로 두고 쉬뮈엘을 만난다. 황량하고 낯선 땅에서 쉬뮈엘은 브루노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쉬뮈엘에게 빵과 치즈 같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쉬뮈엘이 원래 살던 곳에서 억지로 이사를 오게 된 상황이 똑같다며 좋아하는 브루노는 천진 그 자체이다. 베를린으로 다시 떠나기 전 아우슈비츠에서의 마지막 날, 브루노는 쉬뮈엘의 아빠를 찾아주기 위해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철조망 너머로 들어가게 된다. 수용소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쉬뮈엘의 아빠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던 때에 브루노와 쉬뮈엘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행진 대열에 끼게 된다. (쉬뮈엘은 브루노에게 ‘행진’을 한다고 했다.) 기다란 방에 갇힌 브루노와 사무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브루노의 시점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일년 후 브루노의 아버지는 철장 앞에 놓인 브루노의 옷을 발견하게 되고 좌절한다.

 먹먹했다. 한참을 먹먹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느낀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슬픔에 정적이 감돌았다. 브루노가 불쌍해서? 유태인 학살이 충격적이어서? 그 많은 유태인들이 죽었음에도 크게 와닿지 않던 슬픔이 브루노가 죽었을 때 왜 이렇게 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관객들은 브루노의 죽음은 안타까워하지만 유태인의 죽음은 관심 밖이다.’

사실 내 슬픔의 정적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시 살펴보고 곱씹으며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브루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것도 모르던 순수한 아이였다. 죄수복의 숫자를 보고 무슨 게임을 하는거냐고 묻고 가스방 문이 닫힐 때까지 비를 맞지 않게 해주려 한다고 생각하던 아이였다. 브루노의 때 묻지 않은 시선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브루노는 유대인이라서 나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점 때문 아니었을까. 모든 갈등과 사건의 원인은 편가르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편을 갈라 멋대로 생각하고 편견을 만든 적이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역사적 사건에서도, 작게는 색깔이나 음식에게까지 잣대를 들이밀었다. 브루노는 한 번도 편을 갈라 생각하지 않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영화감독을 포함한 우리가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도 바로 이런 ‘편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더 불쌍해야한다는 편가르기식 생각 말이다. 우리가 브루노의 죽음에 슬퍼하고 애통해한 까닭은 바로 브루노의 끝까지 빛나던 보석 같은 순수함 때문 아니었을까. 

 나치는 유대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브루노가 유대인들과 같은 죄수복을 입고 수용소를 들어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때 그들은 모두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따라서 브루노의 안타까운 죽음은 나치건 유대인이건 그저 사람들로 봤던 ‘브루노다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브루노의 아버지 사령관은 브루노가 그렇게 죽어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브루노의 죽음이 오래도록 먹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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