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드라큘라>, <노스페라투>가 표현하는 것들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음침하고 은밀한 장르, 뱀파이어
서양의 공포물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날까? 우리가 전설의 구미호를 가지고 있다면 서양은 드라큘라, 뱀파이어가 아닐까 싶다. 설화로 이어지던 뱀파이어는 문학과 영상의 탄생으로 공포물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뱀파이어’가 예술 소재로써 처음 등장한 것은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라는 단편 소설이다. 이를 시작으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우리에게 –정확히는 서양인들에게- 뱀파이어를 공포의 대표적인 소재로 자리 잡게 했다. 사람들이 영상으로 처음 접한 뱀파이어는 19세기, <노스페라투> 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인 무르나우 감독의 연출과 영화의 원작,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고딕소설의 양식이 합해져 ‘노스페라투’라는 표현주의와 뱀파이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 되었다.
수많은 뱀파이어물이 쏟아져 나온 지금, 뱀파이어라는 주제로 문학과 영상을 비교하기 위해 뱀파이어 ‘문학과 영상’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 (1819)>,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손님 (1914)>,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 (1922)> 세 작품을 모두 감상해보았다. 이들이 작품 속에서 뱀파이어를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용하며 전개해나가고 있는지를 포함하여 작품적인 면에서도 어떠한 느낌을 주는지 분석하고 생각해보았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손님>은 ‘드라큘라’라는 캐릭터로 인한 공포보다는 주변 환경과 음산한 분위기의 묘사, 그로 인한 주인공의 겁에 질린 심리 표현의 나열로 소설을 전개한다. 실제로 뱀파이어가 직접 등장한 것은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편지와 제목 뿐이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져 멈추어 섰다. (생략) 나는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여 점점 지독해지는 냉기에 심장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라는 대목은 이 소설이 가진 공포를 가장 잘 나타낸 구절이 아닐까 싶다. 스토커는 이렇게 음침하고 시퍼런 분위기만 잔뜩 고조시키다가 마지막에 뱀파이어라는 이름을 던져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정체의 등장과 동시에 소설이 끝나는 것이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무서운 정체가 명확히 들어나지도 않은 채 끝났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뱀파이어가 제대로 등장하는 어떤 다른 소설의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고 찾아보니 실제로 <드라큘라의 손님>은 브람 스토커 장편 소설 <뱀파이어>의 첫 장으로 집필되었다가 삭제되고 나중에 따로 출간된 것이라고 한다.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내가 흔히 떠올리던 익숙한 뱀파이어 이야기였다. 비록 뱀파이어 이야기의 시초 정도 되는 짧은 소설이라 우리가 열광하는 뱀파이어의 부가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는 덜해 심심하였지만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였다는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드라큘라의 손님>과 달리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캐릭터와 그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공포스런 내용을 전개한다. 주변 묘사나 분위기 조성이 비교적 적고 루스벤의 행동이나 말, 그로 인한 주인공의 태도 변화 등이 독자들을 흥미롭게 한다. ‘무표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 한 번으로도 심장을 멎게 만드는, 섬뜩한 회색 눈동자’ 라는 구절이나 ‘납빛으로 물든 그의 두 뺨’ 등의 묘사를 살펴보면 뱀파이어 ‘루스벤’은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뱀파이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의 루스벤이 사람들에게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주었다고 한다.
두 개의 뱀파이어 문학 소설을 읽고 드라큘라 영화의 원형이라는 <노스페라투>를 감상하였다. 노스페라투는 브람 스토커 <뱀파이어>의 무허가 각색 영화이다. 이것이 노스페라투가 드라큘라라는 제목을 가지지 못한 이유이다. 노스페라투의 감독 무르나우는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이라고 불린다. 무르나우의 표현주의와 뱀파이어라는 고딕 소설의 만남은 소재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상의 기괴함을 만들어냈다. 그로테스크 + 그로테스크가 노스페라투가 이토록 칭송받는 까닭이 아닐까한다. 고딕소설은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고딕양식의 건물 안에 갇혀 일어나는 초현실적 이야기를 말한다.
사진은 <노스페라투>의 장면 중 하나로, 뱀파이어 오를록 백작이 사는 성이다. 하늘로 갈수록 지붕이 뾰족해지는 고딕양식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노스페라투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전형적인 드라큘라 백작의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 깔끔하고 점잖은 모습에 차가운 인상의 뱀파이어가 우리가 가진 백작의 이미지라면, 노스페라투의 뱀파이어는 ‘괴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외형을 가졌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러한 백작의 외형은 관객들로 하여금 노스페라투의 뱀파이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려는 무르나우의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뱀파이어물은 우리에게 차갑고 냉혈한 공포감을 주었다면, 노스페라투의 기괴한 생김새의 뱀파이어가 시선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크고 긴 손가락을 움직이고 이빨을 내밀 때 나는 기분 나쁘고 심지어는 더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 뱀파이어는 전염병을 퍼트리는 쥐와 같은 취급을 받고 거미, 파리지옥, 촉수에 비유 당하며 비열하고 야비하게 생명을 이어나가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렇게 더럽고 공포스러운 것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혼비백산이 된다. 실제로 노스페라투의 그리스 어원은 ‘nosophoros’ 로 ‘병을 옮기는 자’를 뜻하는 단어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를 당시 사회의 무의식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포영화는 그 사회의 무의식 안에서 억압된 존재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장르라고 한다. 19c 당시 서양은 외부로부터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응집되어 바다 건너에서 배를 타고 밀입하여 병을 옮기고 마을 전체를 오염시키는 ‘드라큘라’ 라는 공포 소재가 된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라는 시선에서 영화를 바라본다면 당시 전쟁에 패배한 독일은 그들의 심리를 대놓고 드러내지 못해 기괴한 배경과 명암의 극단적 대비 등을 통해 혼란스럽고 퇴폐적인 상황을 표현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를롤 백작의 기괴한 형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 백작의 그림자, 난장판이 된 마을 분위기 등으로 당시 시대 상황의 혼란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뱀파이어 영화’ 라는 내부적인 관점에서만 살펴보자면, 앞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손님>은 주변 분위기의 묘사로,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캐릭터의 성격으로 공포 소설을 전개해나갔다. 무르나우는 표현주의 연출 기법인 기하학적 배경과 명암 뿐만 아니라 반복적인 음산한 음악들, 카메라 움직임 등 <노스페라투>만의 ‘문체’로 공포영화를 전개한다. 만일 이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우리가 노스페라투를 보며 느낀 공포감은 훨씬 덜했거나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뱀파이어 관련의 세 작품 모두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감상하며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 작품을 비교해보았을 때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은, 뱀파이어를 접하는 주인공은 모험심이 강하고 호기심 많은 평범한 영국 젊은 신사라는 것이었다.
뱀파이어가 문학으로 재탄생하고 뜨거운 반응을 얻은 당시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Lady and Gentleman’을 사회적 통념으로 삼고 여성과 남성을 그 틀에 가둬넣은 보수적인 사회였다. 이러한 억압된 사회에서 뱀파이어는 주인공처럼 평범한 신사의 모습을 한 사람들의 표출할 수 없는 욕망을 대리 충족해주는 존재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