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아가는 독서에 대하여
신형철 문학 평론가의 글 모음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고 있다.
다른 사람의 벌거벗은 생각들과
그 생각들의 영감이 된
또다른 사람의 벌거벗은 시작(詩作)들.
생각은 기록해야 커지고 기록하며 커진다.
두루뭉술한, 엇비슷한 아이디어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느끼는 그것, 딱 그것을 짚어내고 백프로 느낄 줄 아는 자가 온전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게 된다.
- AM 1:19. 느낌의 공동체를 읽으며,
메모장에서-
사실 이 책은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 아니다. 학교 도서관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을 훑어보다 눈에 들어온 제목이 바로 ‘느낌의 공동체’였다. ‘느낌’을 다룬다라. ‘느끼는 것’만큼 주관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 또 있을까? 사실 느낌은 절대적으로 두루뭉술하고 희미하지만 바람 한 점, 물 한 방울에도 극도로 예민해지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러한 느낌의 공동체를 다룬다는 책은 어떤 책일까 궁금하였다.
느낌의 공동체는 저자 신형철의 생각의 기록들, 느낌의 모음들을 하나로 엮은 책이었다. 그의 사유에 영감이 된 모든 시들과 영화, 소설, 사회 이슈들을 그 생각 첫 번째부터 차근차근 다루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가 생각하는 법, 사고 확장의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마치 ‘느낌’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작품에 대한 그의 코멘트는 단순한 평론가의 평론이 아니다. 생각의 가지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독서를 하였다. 피사체가 되는 시와 그에 대해 적어나간 생각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며 내 생각들도 함께 가지를 펼치며 시, 논평, 내 생각들이 함께 책을 완성해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읽기’보다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 같다. 그 전까지 내가 했던 독서는 그저 읽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책을 통해 바뀐 점 두가지는 ‘시’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나에게 ‘시’란 별거 아닌 자그만 일상이나 물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특별하게 다루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에 대해 박수치고 특이하고 아름다운 표현에 감탄하는게 다일 뿐, 시에 대한 큰 감명은 받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받아온 문학 수업의 영향이 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신형철의 논평과 논평의 주제가 된 시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하나의 시에도 그것의 성격과, 자아 정체성과, 성격과 자아 정체성이 형성된 과정들이 나타나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있으나 없으나 한 소재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시가 아닌,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어버린, 즉 인생을 노래하는 시를 읽는 법을 배웠다. 이 때까지 시를 읽는 것은 학교 수업을 위한 목적밖에 없었는데 이 책을 계기로 시집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야심이 생겼다. 책 중 이런 말이 있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생략)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게 이런걸까. 책을 읽으며 나는 문학에 대한 사랑과 글에 대한 열정과 문학이 되고픈 열망을 읽었다. 문학에 대한 진심과 내면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줬다는 것이 느껴져서 딱딱하고 진리만을 말하려는 듯한 평론글보다 훨씬 와닿았다. 떠듬떠듬이긴 하지만 함께 진심을 다하며 책 전체를 읽어버렸고 문학에 대한 갈증이 전염된 듯 했다. ‘느낌의 공동체’라는 신형철의 메모 모음들을 읽으며 한 번 더 다시 크게 느낀 점이 있다. 생산성 있게 살아간다는 것은 기록하는 것이다. 그 때의 그 감정 오롯이 그 때의 내가 가진 그 생각을 기록하고 다음의 내가, 혹은 타인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 기록하고, 생각하자. 지금의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