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사는 영포자의 영어 공부 비법을 공개한다!
2020년 3월 2일,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에서 입국심사를 했다. 입국심사관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들리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원체 하지 않았기에 영어를 잘하지도 못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더욱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서류를 잘 준비한 덕에 어려운 질문 없이 입국심사를 마쳤다. 게다가 더 다행히도 비자 담당 공무원이 한국어로 질문했다. 노란 머리에 새하얀 피부의 완전한 백인이었지만, 한국어를 공부 중이라고 했다. 운이 좋아도 아주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국어를 사용하며 캐나다에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어를 못해서 캐나다에 왔다
수능 외국어 영역 5등급, 토익 600점, 그것이 나의 영어 수준이었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았고, 말은 더욱더 하지 못했다. 캐나다 컬리지 지원을 위해 아이엘츠 시험을 봤는데, 스피킹이 3.0점이었다. 그런데도 캐나다에 온 이유는 어차피 한국에서 영어 점수 없이는 좋은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고, 한국의 삶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나와 결이 맞는 세상을 찾아보고자 캐나다행을 택했다. 영어를 원 없이 공부해보고, 해외 취업도 도전해보고, 그리고 영주권까지 목표로 하는 유학이었다. 보통 유학 후 이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30년을 살면서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친 적이 많았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좋은 직장에 지원하지 못했다. 영어라는 벽이 항상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해야 되겠다 생각하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꼭 해야 하는 성격 탓에 쉽사리 ‘영어’라는 녀석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영어를 잘하게 된다면 분명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어떻게든 영어를 극복해보고 싶었다.
한국에 있으면서 영어 관련해서 남들 하는 건 다 해본 것 같다. 토익 학원, 토익 인강, 영어 원어민 회화수업 등 이것저것 많이 해봤다. 00스쿨, 야0두 등도 다 해봤다. 그래서 그나마 토익 600점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란 것이 원래, 나와 맞는 방법을 찾아야 효과가 있기 마련이다. 전교 1등의 공부 방법을 똑같이 따라 한들 내가 전교 1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한국의 영어 교육 방식은 나와는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30대 중반에 유학 후 이민, 남들이 볼 땐 무모한 도전으로 봤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많이들 그렇게 얘기했다. 돈을 한창 모아야 할 나이에 돈을 쓰러 나가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보다는 나은 곳을 찾고 싶음 마음 하나, 그리고 어떻게든 영어를 극복하고 보다 많은 기회를 찾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었다. 만약 이민에 실패하더라도 영어라도 반드시 해결하자는 플랜 B가 있었다.
하루 10시간 영어의 늪에 빠지다
목표는 명확했다. 3년제 컬리지 프로그램에 등록했는데, 만약 3년 안에 영어가 해결 안 되면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빈털터리로 나이 40이 다 되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니면, 3년 안에 어떻게든 영어를 내 것으로 만들어 캐나다에 제대로 정착하고, 안정적인 삶을 이루어 목표했던 이민을 완성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자는 절대 있으면 안 되는 시나리오였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종일 영어에만 매달렸다. 캐나다 도착 후 6개월은 컬리지에서 EAP(English for Academic Purposes) 코스를 수강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로나로 인해 모든 강의가 온라인으로 바뀌었고, 개인 공부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EAP는 아이엘츠 점수 부족으로 본과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지, 여기서 영어를 완성할 것이라곤 생각 안 했다.
온라인으로 수업이 바뀌면서 원래 학교에서 진행했던 액티비티가 모두 과제로 대체되었고, 수업이 일찍 끝났다. 하루에 3시간씩 수업했다. EAP 수업 이후에는 구문 강의를 보며 3시간을 더 공부했다. 저녁에는 학교에서 받은 과제와 시험공부를 2시간씩 했다. 에세이 과제를 할 때는 구문 강의 때 익힌 내용을 최대한 활용하여 EAP 수업과 개인 공부 간에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아침과 저녁에는 1시간씩 영어 어학기 어플을 통해 영어 패턴을 익히고 말하기를 연습했다. 그밖에도 점심과 저녁을 먹으며 매일 똑같은 영화만 계속 틀어놨다. 이런 삶을 6개월 동안 지속했더니, 그제야 영어가 편하게 들리고 말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영어로 브리핑을 시작하다
캐나다 온 지 6개월이 지나 본과에 갔다. EAP는 다 외국인(국적은 캐네디언이지만 누가 봐도 이민자인 사람 포함)이었지만, 본과는 80%~90%가 캐네디언이었다. 우리 반에 아시안은 나와 필리핀 출신 캐네디언, 딱 둘이었다. 드디어 내가 캐나다로 유학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팍 들었다.
전공과목 중 2인 1조로 매주 실습을 하는 수업이 있었다. 영어도 못하는 아시안인 나는 마지막까지 짝을 찾지 못한 캐네디언과 한 조가 되었다. 이 친구는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매주 수업에 지각했고, 그날 무슨 실습을 하는지 과제 확인도 안 하고 수업에 왔다. 솔직히 수업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과제를 잘 끝내야만 했기에, 매주 이 친구에게 과제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오늘 해야 할 실습 과제와 최종 결과물의 모습, 장비의 사용법을 매주 영어로 설명하는 시간을 그 친구 덕에 강제로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 4개월이 지나갔고 내 영어 실력은 한 층 더 성장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친구 덕에 영어 참 많이 늘었다.
영어로 전공을 가르치다
10명씩 매주 새로운 팀을 짜서, 팀 과제를 하는 수업이 1학기 때 있었다. 캐나다도 한국과 똑같다. 공부는 하는 놈만 한다. 매주 조장을 자처했다. 팀원들의 리포트를 취합하고 편집해서 최종 결과물을 제출했다. 그러다가 운명의 캐네디언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와 한 학기 동안 딱 두 번 같은 조를 했는데, 학기가 끝날 때쯤 ‘너 마음에 드는데, 같이 밥 먹을래?’라고 연락이 왔다. 개인적으로 만나니 굉장히 수줍음이 많고 서글서글한 친구였고, 성격이나 관심사가 서로 굉장히 잘 맞았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시간을 매주 갖기로 했다.
관련 전공을 한국에서 이미 공부했고, 군 생활하며 관련 실무를 경험했기에,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공과목 과외를 해줬고, 친구는 영어를 영어답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한국과 캐나다에 대한 이야기와 취미 생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1시간 이상의 잡담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2학기 내내 그 생활을 이어갔다.
2학기 이후에는 4개월 간의 코업(Co-op, 유급 인턴)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영어 실력은 친구랑 대화할 정도는 되어도 일을 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고, 게다가 아내도 임신한 상태여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한국 회사로 코업을 구했다. 4개월 코업 중에도 그 친구와 매주 주말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3~4학기 때는 과제를 위해 주말마다 7시간 이상을 함께 공부했다. 덕분에 이 친구는 캐네디언 베스트 프랜드가 되었고, 8개월 코업 중인 지금도 매주 안부를 물으며 같이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캐나다 로컬 회사에 취업하다
캐나다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곧 8개월 코업, 두 번째이자 마지막 코업 시즌이 다가왔다. 이번에 캐나다 회사로 취업을 못하면 짐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영어가 편해졌고, 영어 농담을 들으며 웃기도 할 수 있어서, 영어가 제법 발전했음을 체감했다. 이번에는 아기도 출산한 이후여서 특별히 집안에 걱정거리도 없었고, 코로나 백신도 다 맞았고, 무엇보다 영어가 편해졌기에 캐나다 로컬 기업으로 취업을 도전하기로 했다.
이력서를 꼼꼼하게 점검한 후 10개 이상의 캐나다 런던 내에 있는 회사로 이력서를 돌렸다. 8개월 코업을 위해 이사를 갈 순 없었다. 하지만 정말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과 선배를 통해 선배가 일하는 곳에도 이력서를 냈는데, 회사 부사장이 이런 피드백을 줬다고 했다. “이 친구는 Overqualified 야.” 그랬다. 내가 지원하는 포지션은 코업을 위한 엔트리 레벨의 잡인데 나는 관련 학력과 경력이 있었다. 굳이 고학력 유경력자를 엔트리 포지션에 앉히고 돈을 많이 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고민을 친구에게 얘기했다. 친구가 약혼녀 아버지께 내 이야기를 해준다고 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20년 이상 일하신 분이었다. 그러자 회사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인터뷰 제안이었다. 더욱이 우연인지 하늘의 뜻인지, 컬리지 성적이 좋아 학교 교수님으로부터 취업 추천을 받았는데 같은 회사였다. 나는 동시에 두 개의 레퍼런스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영어 인터뷰를 봤다.
인터뷰 후 이틀이 지나 잡오퍼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2020년 3월 2일에 캐나다에 왔고, 정확하게 2년이 지난 2022년 3월 1일에 잡오퍼를 받았다. 아이엘츠 3.0점이었던 영어 포기자라는 과거를 극복하고 영어 인터뷰 후 캐나다에서 직업을 구했다. 게다가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라는 관리직군의 잡이었다.
이제는 매일 10시간 이상 영어를 사용한다. 매일 동료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점심시간엔 하하 호호 떠들며, 협력업체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다. 영어도 매일매일 더 늘고 있다. 2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
상상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면…
캐나다는 2년 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확실하게 해 줬다. 게다가 지금 다니는 회사 시니어 매니저로부터 다음 학기 중 파트타임 제안을 받았고, 졸업 후에도 지금 회사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 캐나다 이민의 초기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으며, 데드라인으로 잡았던 5년보다 훨씬 빨리 캐나다에 정착하였다. 상상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