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교실의 최장 등록 학생인 R은 영국인이다.
처음 인사를 나누고 소개를 할 때, 선생님이 "얘 영국 사람이었어!"라고 끼어들자 R은 "아직도 영국 사람이거든?"이라고 받아쳤다. 그만큼 독일에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첫날 만났을 때부터 몇 주만 있으면 정년퇴직을 한다고 신이 났던 바로 그 R이다.
영국 노래와 미국 노래를 많이 부르는 우리 노래교실에서 R은 소중한 존재다. 영어 원어민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편집한 노래 책에는 오타가 겁나 많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알아본다. 다만 아무도 뜻을 모르는 영어 단어가 있을 때는 언제나 R을 소환한다.
독일 생활을 오래 해서 언어에 문제가 없는 R이지만, 가끔 단어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 태반이 19세기나 20세기 초중반 노래에 50~60년대 정도 되면 '요즘 노래'인데, 따라서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나 표현이 심심찮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생님도 영어를 잘하시고 다들 영어를 어느 정도 하기 때문에 R이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서 설명하다 보면 대충 이해하게 된다.
가끔 미국 포크 송을 부를 때는 다들 혀가 꼬여서 난리가 난다. 박자가 낯설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자인 경우에는 중간에 낙오자가 생길 때도 있다. 아무리 영어를 잘 알아듣는다고 해도 처음 보는 노래를 외국어로 부르기가 쉽지는 않지.
독일 생활을 하다 보면 보통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외국인과 접촉이 있고 교류하는 독일인'을 더 많이 만나게 되기 마련이고, 특히나 영어로 일을 하는 회사, 국제적인 회사에 다닌다면 영어를 잘하는 독일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생존이야 어느 정도 독일어만 익히면 몸짓 발짓과 함께 생활이 되긴 되니까, 영어를 잘하는 경우에는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도 사는 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다.
독일 사람이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은 왠지 그 반대보다 덜 놀라운 느낌이다. 하지만 의외로 영어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그렇고, 우리 노래 교실 사람들이 그렇다. (선생님 제외.) 선생님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만 영어/스웨덴어를 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삘을 받았다 하면 영어 노래만 주야장천 부르는 날도 있다. 그러면 정신없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바로 학생들.
나야 영어나 독일어나 둘 다 외국어인 데다가 둘 다 100% 이해하지 못하니 애초에 모든 걸 포기하고 수업에 임하지만 (ㅋㅋ) 많은 노래를 모국어로 부르다가 갑자기 휙휙 영어로 바꾸면 정신없을 것 같긴 하다.
60년대에 독일의 슐라거 콘테스트에서 무려 1위를 차지했던 미국 가수 페기 마치. 나중에 한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때 페기는 가사의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외워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도 약간 익숙해지고 있는 노래들이 이런 듯.. 가사를 굳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며 부르는 기분이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