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믿을 수 없는 내 기억력에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여기저기 디지털 세상에 흩뿌려놓은 나의 흔적을 따라가는 편이 한 해를 되돌아보기에는 도움이 된다. 블로그니 인스타그램이니 하는 소셜 미디어 외에도 가끔은 내가 공유했던 정보나 했던 말이 헷갈려서 친구와의 카카오톡 채팅방을 다시 들어가서 검색하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 디지털 치매가 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냥 농담으로만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게, 20대였던 10년도 전부터 이미 치매에 좋다는 활동을 하고 있다니까.
2022년 나의 시간은 너무도 힘겹게 지나갔다. 비슷한 상황에 있던 친구는 아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한 해라고 했다. 나도 그런가? 하면서 되묻고는 이 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릴까 싶어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면 또 중간중간 재미도 있었고 추억도 만들었던 한 해였다. 사실은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서는 기를 쓰고 일부러 만들어 낸 즐거운 순간들이다. 처음 느껴보는 불쾌하고도 슬프고도 화가 나는 감정. 나 자신이 너무도 불쌍하고 딱하면서도 스스로가 쓸모없다는 생각에서는 빠져나오려고 노력했던 시간. 많이 울었고 멘탈이 수십 수백 번 부서지고 붙었지만 동시에 이게 '내 인생 가장 힘든 시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몰랐던 슬픔이나 힘듦을 더 겪게 되겠지. 지금 이건 예방주사라 생각하면서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연습하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또 익숙해지는 것이다.
2022.01.
새해 첫날이 밝기도 전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겨울인 데다가 코로나의 여파로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어 휑했던 회색의 베를린은 코로나 이전 푸른 여름에 다녀왔던 때보다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동시에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해 더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가을에 등록했던 노래 교실도 종강이 다가왔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참 좋았는데. 노래 선생님은 나를 환영한다며 하루는 종묘제례악을 틀어놓고 기다리기도 하셨다.
2022.02.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뮌헨 맛집 탐방도 다니고, 주말 브런치도 함께 하고, 가까운 근교 나들이도 다녀오며 보냈다. 외식을 정말 많이 했구나.
2022.03.
친구와 당일치기로 잘츠부르크에 다녀왔다. 계획 없이 갔지만 그때그때 지도를 찾아가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카페 탐방도 하고 알찬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보니 여전히 친구들과 만나서 맛집 발굴도 하고, 새로운 친구도 만났던 달이었네.
2022.04.
뉘른베르크 가족 여행..인데 눈이 펑펑 내려서 이것이 독일의 4월 계절이구나 했다. 한스 짐머 콘서트도 다 같이 관람했는데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4월 중순에는 친구부부들과 다 같이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최대라는 메라노의 궁중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알레르기 때문에 눈물 콧물을 다 뺐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며칠 뒤에는 드디어 한국행! 동네 친구들 및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는 미리 예정해 둔 강원도 여행을 친구들과 다녀왔다. 많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겁게 놀았던 시간.
2022.05.
목포 아니면 부산을 꼭 가보고 싶다는 남편의 의견에 친구들의 피드백을 더해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나도 주체적으로 다녀본 것은 처음인 데다가 거의 10년 만에 온 부산이라 색다르고 재미있었다. '영도 산토리니'가 아주 기억에 남아서 이틀 연속으로 다녀왔다. 겸사겸사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만났다. 이후 큰 외삼촌네를 뵈러 충청도도 다녀오고, 지도 덕후인 남편이 찾아낸 몰랐던 서울의 이곳저곳도 다녔다. 제대로 된 쌀밥 정식을 대접해 주겠다는 친구 덕분에 이천으로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고, 출국 전날에는 미리 인천으로 가서 조개구이도 먹고 짧은 인천 여행을 한 뒤 독일로 돌아왔다. 미용실도 가고, 마사지도 받고, 각자 타투도 하고. 26일 정도 되는 시간이었는데도 금세 지나갔다. 돌아와서는 또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 전시회 보러 프라이징도 다녀오고, 5월 말에는 마요르카로 떠나서 재미있게 먹고 마셨다.
2022.06.
본격 여름을 즐겼다. 다시 미술관도 다니고, 근교로 피크닉도 가고, 뮌헨 산책도 많이 했다.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친구가 와서 프라이징과 근처 호수를 함께 돌아다녔다. 여자 친구들과의 부다페스트 여행도 있었다. 각자 다른 사정으로 뮌헨이라는 곳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된 인연인데 가족 같은 친구들이라는 식상한 비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친구들이다. 다 같이 여행을 간 것은 처음인데 의외로 또 여행 합이 아주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시간과 상황만 맞으면 주기적으로 이렇게 해외여행을 같이 다니면 너무 좋겠다. 돌아와서는 매주 돌아가면서 열리는 뮌헨의 벼룩시장도 부지런히 돌고,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MASH 페스티벌도 매일 보러 가고, 여름 톨우드 축제도 즐겼다.
2022.07.
꾸준히 다니던 벼룩시장에서 자전거를 발견하고는 바로 사 왔다. 일주일에 세네 번씩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베를린에 사는 친구가 뮌헨으로 와서 몇 년 만에 만났는데 (1월 베를린 방문 시 확진자의 밀접접촉자여서 격리하느라 만날 수 없었다.) 오랜 친구는 역시 오랜만에 만나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처음으로 우리 아파트 여름 파티에도 참가해 이웃들과 안면을 트고 수다를 떨었다. 친구의 동생들도 뮌헨을 방문했기에 집으로 초대해 한국 음식을 먹였다. 독일 10대들과 이야기해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마무리는 너무도 아름답고 즐거웠던 친구의 결혼식.
2022.08.
유럽 챔피언십이 열린 뮌헨의 여름. 주변 친구들 중 챔피언십을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몇 주 동안은 이런저런 경기를 관람하고, 부대 행사로 열리는 콘서트도 다니느라 바빴다. 중국에서 친했던, 독일 서쪽에 사는 친구가 뮌헨에 방문해 또 한 번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였다. 다른 주에는 역시나 중국에서 친했던, 이번에는 독일 동쪽 끝에 사는 친구 커플이 놀러 와 매일매일 같이 시간을 보냈다. 들판에서 매주 꽃을 구매해 집에 꽂아두었고, 야외 클럽 행사도 종종 다녔고, 비어 가든도 즐겼고,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영화도 여름엔 좀 더 자주 봤다. 올림픽 공원에서 하는 불꽃놀이 축제도 가고, 새로 연 가스타익 HP8의 알프스 음악 축제도 가고, 시내에서 열린 CSD 행사도 가서 Glasperlenspiel의 콘서트도 봤다.
2022.09.
스페인어로 진행하는 연극 수업에 참여했다. 소수정예로 구성되어 스페인어에도 연극에도 관심 있는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수업이었다. 비스바덴 여행을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 회포도 풀고, 함께 마인츠도 다녀왔다. 근처인 김에 프랑크푸르트에 들러 한국 음식도 먹고 한국 카페도 갔다. 여전히 열리고 있는 거리 축제도 친구들과 다녀오고, 생일 기념 근사한 외식도 했으며 친구들이 준비해 준 파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를 들러 루마니아로 가족들을 보러 다녀왔다. 이전 방문에는 가족들을 만나는 데 정신이 없었다면, 이번에는 오라데아와 티미쇼아라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마침 티미쇼아라에서는 헝가리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 다 함께 다녀왔다. 오는 길에도 부다페스트와 케치케메트를 들렀다. 마지막 주에는 친구들과 옥토버페스트도 가고,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와 만나 목이 쉴 정도로 수다를 떨었다.
2022.10
날이 흐리길래 충동적으로 이탈리아로 향했다. 볼차노를 들러 와인 스트리트에 위치한 에판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마침 동네 와인 축제가 있어 들렀는데, 뮌헨에서 왔다고 했더니 와인을 내어주시는 분이 지금 한창 옥토버페스트 중인데 여기를 왔냐며 웃었다. 칼테른과 트라민 등등 주변에 있는 다른 마을들도 들러 구경하고 와인도 몇 개 사 왔다. 아우크스부르크도 오랜만에 다녀왔는데, 몇 년 전 갔던 맥주집이 세련된 터키 카페로 바뀌었더라. 시내 역사 깊은 인테리어 가게에서 열린 가을 축제도 다녀오고, 새로 연 레고 스토어도 다녀오고, 실내로 자리를 옮긴 여러 이벤트에도, 친구의 전시회에도 다녀왔다. 헝가리어 수업도 시작해서 매주 다니기 시작. 그리고 연휴가 있는 마지막 주에는 프라하로 출발.
2022.11
프라하에서는 열심히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녔다. 둘 다 첫 방문이 아니라 비노흐라디라는 동네를 중심으로 슬렁슬렁 산책하면서 보낸, 나름의 힐링 여행이었다. 돌아와서는 댄스 퍼포먼스 공연도 보고, 친구들과 볼링도 치고, 연례행사인 Wildwoche 가족 외식도 했다. 중순부터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어서 마켓 투어를 다니기 시작. 10월에 고장 났던 폰이 살아날 기미가 안 보여서 결국 새 폰도 장만했다. 쿠바 댄스 수업 맛보기 체험을 갔다가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기도.
2022.12
역시나 연례행사가 된, 디센으로의 나들이로 시작했다. 그곳에 계신 한국 작가님들의 도자기를 주섬주섬 쟁여왔다. 몇 달 전부터 예약했던 잠룽 괴츠도 다녀오고, 몇 년 간 문을 닫아야만 했던 다양한 컨셉의 크리스마스 마켓들도 다녀왔다. 딸기 글뤼바인이 맛있는 굿 메르겐타우까지. 그 유명하다는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마켓도 다녀왔다. 가스타익에서 주최한 살사 파티도 다녀오고, 스페인어 및 중국어 말하기 모임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또 한국에서 친구가 와서 며칠 내내 친구와 하루종일 붙어 다니며 지내기도 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뮌헨 근교 여행도 참 많이 다녔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가족들과, 다음날은 친구네 가족과 함께 보냈다. 겨울 톨우드도 즐기고, 조금은 먼 베르히테스가덴과 바트 라이헨할까지도 다녀오고, 무르나우도 또 다녀왔다. 그리고 12월 31일 실베스터 날은 가까운 친구들과 다 함께 모여 새벽까지 즐겁게 놀았다.
2022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절대 긍정적일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한 해를 통째로 지워버리기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순간들도 많았다. 이렇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들이 버무려져 있는 것이 삶이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