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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g May 16. 2023

이스트리아 반도로 가자 4

슬로베니아, 피란

류블랴나에서 피란으로 가는 길에는 산이 낮아지면서 익숙한 바위가 보여 한국 고속도로 생각이 났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의외로 건물이나 언어보다도 식물을 통해 색다름을 느낄 때가 많다. 식상하긴 하지만 그놈의 야자수를 보려고 너도나도 남쪽으로 날아가는 이유도 그런 거 아닐까. 멕시코에서는 길거리에 너무도 무심하게 줄지어져 있던 선인장과 알로에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고, 봄날의 마요르카에서는 보랏빛 자카란다 나무가 너무 예뻐 보이기만 하면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 댔었다. 몇 년을 살고 있는 독일 생활도 익숙해졌다고는 생각하지만, 붉은 단풍 없는 가을은 아직도 뭔가 허전하다.


포르토로즈에 가까워지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르게 생긴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국적인 나무들까지 보이니 휴가 속의 휴가를 떠나온 기분. 포르토로즈는 특히나 휴양으로 머무는 곳이라고 하는데, 과연 지나가면서 보이는 집들 중 대부분은 다 숙박업소였다.


곧이어 피란에 도착. 한국 사람이라면 이 '피란'이라는 이름으로 말장난을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게 정상 맞겠지? 류블랴나에 이어 두 번째 슬로베니아 도시 방문인데, 수도인 류블랴나와 다른 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일단 자그맣고 귀여운 데다가 피란 만에 위치해 안으로 쑤욱 들어온 해안선이 인상적이다. 베네치아의 상징인, 또는 제너럴리 회사 로고로 더 유명할지 모를 날개 달린 사자도 여기저기 보인다. 역시, 몇백 년 간 베네치아 공국의 일부였다고 한다. 


유럽은 국가보다는 지역 위주로 문화나 언어, 역사를 봐야 한다고들 한다. 지금의 국경이 정립된 지 100년이 조금 넘는 곳들이 허다하고, 어떤 지역은 수차례 국경이 바뀌기도 했다. 피란 역시 베네치아 공국이었던 역사도 그렇고,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그런지 길거리 표지판이나 안내판에도 모두 슬로베니아어와 이탈리아어가 같이 쓰여있다. 류블랴나에선 보지 못했던 점이다. 이탈리아어는 라틴계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나 스페인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등을 할 줄 안다면 조금은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작은 사실이 뭐라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여행을 계획하기 전부터도 슬로베니아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요란하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라가 아닌, 조용하고 귀엽고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느낌의 8할은 내가 슬로베니아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슬라브어족 언어를 전공한 학생이었거나, 슬로베니아 출신 친구가 있거나 했다면 달랐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수도인 류블랴나조차도 번잡한 느낌 없이 여유 있던 분위기였고, 바닷가 마을인 피란은 더욱 그랬다.


물론 중심 광장과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과 바를 보면 이곳이 확실히 별 다섯 개짜리 관광지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언덕을 올라 성당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근교를 걸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피란 시내에서 보낸 시간은 한 시간이 조금 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인을 네 명이나 보았다. 시내와 가까운 주차장에는 단체 관광객을 태운 커다란 버스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우리는 바닷가를 원 없이 걸을 요량으로 시내와 꽤 먼 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그 주차장에서 피란 시내까지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있었다.


우리는 반짝거리는 윤슬을 내 눈동자에 담겠다는 기세로, 목이 꺾일 듯이 열심히 바닷가를 감상하며 시내로 걸었다. 평소 뮌헨에서의 일상생활에서도 만 보는 거뜬히 넘기 때문인지 걸을만한 거리였다. 좁은 뒷골목과 관광객이 가득한 대로를 번갈아가면서 걸었는데, 뒷골목으로 들어오면 확 조용해지고 사람도 줄어들어 활기가 넘치는 관광지의 분위기를 스위치처럼 켜고 끌 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중앙의 타르티니 광장에는 장이 서 있었는데, 유기농 식품이나 수공예 제품들을 팔고 있었다.


광장을 떠나 성 조지 성당이 위치한 언덕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피란을 내려다보았다. 급할 것도 없고 계획된 일정도 없으므로 성당 옆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은근 사람 구경 맛집(!)이었는데, 다양한 언어가 들리고, 가족 여행이나 친구 여행, 혼자 여행을 온 사람도 있었다. 류블랴나에서 이것저것 사 온 것들을 마침 풀어놓고 먹었는데, 그 어느 카페나 음식점보다도 멋진 뷰와 함께한 간식 시간이었다. 오래 죽치고 앉아있었던 덕분에 사람이 조금 덜 지나가는 틈을 타서 사진도 많이 남겼다. 다시 내려와서는 갔던 곳을 또 가보고, 골목골목을 조금 더 탐방해 보고, 기념품 가게도 구경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박물관도 몇 개 있었고, 해안가에는 음식점이 가득한 데다 호객 행위까지 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내 눈앞에 들이밀며 말을 거는 순간 갑자기 기시감이 들었다.. 이 느낌 나 뭔지 아는데.


시내 중심가에서는 조금 떨어져 한적한 곳에 위치한 카페에서 피란 여행을 마무리하려.. 고 했는데, 카페 내부도 아주 한적해 주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쿨하게 포기하고 오는 길에 봤던 커피 자판기를 향해 걸었다. 오면서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그 옆에는 차가운 음료를 파는 자판기도 있었다. 사실 뭐가 됐든 목을 축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꼭 커피일 필요는 없었다. 남편은 옆 자판기에서 최애 음료인 알로에 주스를 발견해 반갑게 구매했다. 진짜 롯데엣 만든 알로에 주스였고, 제조국도 한국이었다. 뜬금없는 반가움으로 마무리한 피란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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