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랑, 독일이요?

by mig

시간은 흘러 흘러 내가 크게 실감하지 않았다 해도 독일에서 살고 있는 기간이 늘어난다. 독일이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독일 사는 친구'이고 내가 어떤 말을 하거나 그 무엇을 해도 '독일'이라는 키워드가 함께 따라온다. 이번 여름부터 가을, 많은 시간을 런던에서 보내면서 특히나 "독일은 어때?"와 같은 질문을 매일같이 받아오면서 더욱 실감했다. 누군가에게 나는 '독일'의 조각을 전해주는 어떠한 창구이구나.


여러모로 독일 생활에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다. 여행으로 방문한 다른 나라에서 독일어가 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니까. 잊을만하면 뮌헨에 방문해 주는 사람들에게 이곳의 사화문화적인 규칙 내지는 코드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재미있는 행사나 강의가 있다면 영어든 독일어든 여기저기 참여하고 있으며, 여성 이민자들을 돕는 모임에서 무려 멘토 역할로 뮌헨 생활 및 독일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기도 하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


다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어쩐지 묘해지는 건, '독일 사람 다 됐다' 류의 말이다.


독일 여자 분위기가 난다, 독일 스타일이다, 영어를 할 때 독일어 악센트가 느껴진다(!! 영어 원어민인 친구가 했던 이 말은 솔직히 진짜 충격이었다) 등등의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이때 드는 감정은 딱히 싫거나 좋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설명하기도 반응하기도 힘든 묘한 감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딱히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 나의 지향점이 현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 생활에서도 그랬듯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환경의 규범이나 문화는 존중하려고 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현지 언어는 배우려고 하는 예의는 차리지만, 동시에 나의 한국인스러움이랄까, 뿌리를 굳이 부정하거나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국 매체를 거의 보지 않기는 하지만 나는 한국에 살 때도 TV를 보지 않았으니 해외 생활과는 무관하다). 일부러 중국인처럼, 독일인처럼 행동하려 한 적도 없고 현지에서 접하는 일 중 나의 상식이나 가치관과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불평불만도 신랄하게 쏟아낸다. 외국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일부러 이를 따르지 않기도 한다. 나의 생활방식의 어떤 면은 한국에서부터 똑같았지만 독일 사회에 더 맞는 부분이 있고, 어떤 면은 독일에 살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내 일상에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이니 독일이니의 문제가 아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며 변하는 나의 취향에 적용한 내 삶의 큐레이션일 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점인데, 바로 이 '독일스럽다'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쓸 경우). 독일 이민 후 후천적으로 교육받은 결과인 것 같은데, '독일인 같다' '독일스러운'이라는 단어는 자동적으로 나치와 연결된다. 우리와 그들, 독일인과 비독일인을 구분 짓고 가르며 한쪽을 말살하려고 했던 발상의 시작이 바로 이 개념 아닌가. 독일인처럼 생긴 것, 독일인처럼 먹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지. 점점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이민자가 늘어나는 독일 사회에서 획일화된 '독일스러움'이라는 개념의 경계가 어디까지 흐릿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단어를 들을 때 머릿속에 물음표가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세 번째로 떠오르는 이유는, 결국 내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독일도 한국도 아닌 회색지대 어느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이 아무리 나와 독일을 키워드로 연결 짓고, 나를 통해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도, 웃프게도 막상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나는 꽤 자주, 독일과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중국 음식점에 가면 중국어, 일본 음식점에 가면 일본어로 환영 인사를 받고, 2년이 넘게 다닌 헬스장에서는 아직도 종종 영어로 응대를 받으며, 공항이나 병원 등에서는 내가 먼저 독일어로 이야기를 해도 영어로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혹시 독일어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은 Hallo와 같은 인사말로 느껴질 정도이고, 그 어느 모임에 가도 기본적으로 유일한 비백인인 사람이 나다. 한 번은 백화점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방문했는데 그곳에 참가자로 있던 동양인은 나뿐이었고, 다른 아시아인들은 음료와 간식을 서빙하는 사람들뿐인 적이 있어 어떤 기괴함이 느껴진 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독일인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독일에서 20년을 살게 되어도 국적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을 떠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독일 생활에 더욱 익숙해지고, 한국 사회나 문화에서 멀어지는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독일에서 오래 살았든 항상 '한국 사람'일 것이다.


독일과 나를 연관 짓는 표현을 들을 때의 기분이 묘했던 것은, 나의 위치 자체가 묘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도 독일도 잘 알면서, 동시에 한국도 독일도 잘 모르는 상태. 뭐 굳이 선을 그어서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회색도 색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르는 사람의 호의를 기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