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하는 줄
독일어로만 지원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뒤, 나는 두 번째 조건, 스피드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총알은 준비되었으니 보이면 바로 쏜다는 마음가짐. 지금 다니는 회사의 공고도 그렇게 발견했다. 내 기억으로는 공고가 올라오자마자 읽은 뒤, 지원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을 했다. 하루 걸려 자기소개서 Anschreiben 및 이력서 Lebenslauf를 완성한 뒤 바로 보냈다.
그리고는 나름 네 달 간 (거의) 쉬지 않고 주 5일 독일어 학원을 다녔던 나 자신에게, 그 부족한 독일어로 구직활동을 하는 나에게 휴식을 줄 겸, 우리의 작고 짧은 여름휴가를 보낼 겸 베를린 여행을 다녀왔다. 마침 그때 친한 친구들이 한국에서 베를린에 와 있었고, 겸사겸사 베를린 근교에 사는 친구들까지 불러 오랜만에 많은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인연, 한국에서의 인연이 모두 다 베를린에 모였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이 너무 커서 혼자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던 기분이 자주 들었다. 다소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친한 친구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한국어로 수다를 왕창 떨었던 덕분에 스트레스가 금세 사라졌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베를린에 사는 독일 친구와 약속을 하고 비빔밥을 먹으러 간 오후였다. 친구가 조금 늦는다 해서 먼저 우리는 메뉴판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다양한 구성으로 먹을 수 있을지, 후식은 어디서 어떤 것을 먹을지를 궁리 중이었다. 친구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거의 다 왔다는 문자를 보냈고, 답장을 하면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이메일함에는 서류 통과 소식과 함께 곧 전화 면접을 할 것이라는 소식의 이메일이 와 있었다. 회사 측에서 먼저 날짜와 시간을 제안했고, 그 시간이 괜찮은지 확답을 달라고 했다.
긴장을 풀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비빔밥을 먹으려 하던 와중에 온 소식이라니. 무엇보다도 사실 기쁜 감정이 더 큰지, 걱정되고 무서운 마음이 더 큰 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대충 포맷에 맞춰서 쓴 독일어 서류를 보낼 때는 이것이 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는 독일인 찬스를 써서 첨삭을 받은 후에라도 보내지. 대면도 아니고 전화로 독일인과, 독일어로, 면접을 어떻게 보지?????
드디어 면접을 위한 전화가 오는 날.
남편보고는 긴장되고 신경 쓰이니 아예 집에서 나가 있으라고 하고 침착하려 노력하며 전화를 기다렸다.
너무너무 긴장을 해서 목소리가 떨리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고, 어떤 질문들을 던질지 몰라서 노트북을 옆에 두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독일어로 미리 써놓은 화면을 띄워놓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HR의 채용 담당자. 안심을 시켜주려는 듯 웃으면서 편한 분위기로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하고, 회사 소개와 자기소개를 했다. 성비와 연봉, 휴가, 기타 복지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이 소개 부분이 생각보다 꽤 길어서 초반에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귀 기울여 듣기만 하고 듣고 있다는 표시로 추임새만 넣어주면 되니까. 물론 너-무 빠르게, 자비 없는 원어민의 속도로 말해서 랩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알고 보니 이 사람이 그냥 유난히 말이 엄청 빠른 것이었다. 일상 대화도 엄청나게 빠르게 말한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이 회사는 워낙에 서로 반말을 쓰고 (duzen), 편하고 수평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employee marketing의 일환으로 더욱더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을 조금 길게 해야 했던 것은 자기소개, 독일에 왜 왔는지, 독일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지난 경력 및 전공 이야기 조금), 독일에 오고 난 뒤에는 무엇을 했는지 등등이었다. 너무 한국식 면접으로 생각했는지 나는 자신의 장단점 각각 세 개, 미래 커리어 계획 등등까지 독일어로 대충 번역기를 돌려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놨었는데, 면접 때 쓰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 정해진 질문을 한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물어보고, 내 답변에 이은 꼬리 질문을 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전화 면접을 봤을 때가 독일에 온 지 아직 일 년이 안 되었을 때인데, 독일에 온 뒤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당연히 독일어 공부했지. 그러니까 지금 독일어로 면접 보잖아. 나 되게 용감하지 않니?"라고 2절 3절까지 한... 기분.
전화 면접은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첫 전화 면접은 아니었지만 첫 "독일어" 전화 면접이었기에 긴장을 있는 대로 했었고, 그 덕분에 다른 영어 전화 면접들보다 더 예상 질문과 대답을 열심히 준비했었고, 진정한 독일어 원어민의 말하는 속도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낀 경험이었다. 그래도 일단 해냈으니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