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6년.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들을 몇 군데 다녀와야겠다 결심했다. 적당히 저렴한 듯한 비행기표를 모두 결제하고 나니 말 그대로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되었다. 어린 시절 정말 좋아하던 <앞으로> 노래 가사가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이다! 자꾸 걸어 나가기에는 내 체력이 되지 않아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적극 활용해 날아서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온 세상 어린이들과 어른이들도 다 만나고 돌아왔다. 각 나라와 도시의 볼거리나 유명한 장소들에 대해서는 질 좋은 정보가 넘쳐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 하나 없이, 내가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서울 - 아스타나 -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 헬싱키 - 키토 - 바뇨스 - 오타발로 - 보고타 - 살렌토 - 카르타헤나 - 멕시코시티 - 레온 - 오아하카 - 서울
여러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행이니 이번만큼은 계획을 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했던 최소한의 계획마저 쓸모가 없어졌다.
시작은 평범한 러시아 여행이었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만으로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된 J언니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느 재미난 숙소에 묵을지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뒤지는 것부터 잔뜩 신이 나 있는 우리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지낼 숙소를 예약하고 한시름 놓았다 생각했던 우리에게 한국 직장인의 검은 운명이 드리워졌다. J언니의 휴가가 일방적으로 취소된 것이다. 나는 비교적 휴가 사용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비행기표 결제와 휴가 결재를 동시에 진행하거나, 먼저 여행 갈 준비를 해놓은 뒤에 회사에 휴가를 통보하곤 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비행기표와 숙소는 있으나 회사에 휴가는 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러시아 여행은 무기한으로 미뤄지는 듯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J언니는 여전히 여름휴가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 러시아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낮은 가격순으로 정렬한 비행기표를 보는데 '에어 아스타나'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카자흐스탄 친구가 있어 이름만 익숙한 곳이었다. 아스타나에서 환승을 해야 해 가격도 러시아 직항보다 저렴하다. 좋다. 가자, 아스타나로.
에어 아스타나에서 나누어 준 작은 소지품 가방과 기내 필수품 세트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혼자 하는 여유로운 비행, 발을 쭉 뻗고 잠을 잘까 하는데 한 승무원이 나를 찾아왔다. 아, 맞다. 당시 나는 비행을 할 때마다 특별 기내식을 신청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저탄수, 고단백, 베지테리언 등등 여러 옵션을 시도해본 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만들어진 '정결한' 음식인 코셔밀(Kosher Meal)에 정착해 매번 코셔밀을 신청해 먹었다. 양도 왠지 더 많은 것 같고, 대표적인 유대인 음식인 베이글이 종종 나온다. 원칙대로라면 본인이 먹을 음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손을 거쳐야 하고, 따라서 조리 전의 음식 상태 역시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밀봉된 기내식을 열 수 있는 것도 나 자신뿐이다. 그 때문에 승무원이 조리 전의 기내식을 내 자리로 가져와 나의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이대로 음식을 데워도 괜찮겠냐는 질문에 "넵!"이라 답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귀여운 아기가 울고 웃고, 편하게 아빠 품에 기대고 앉아 있다가는 선반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다른 승객들과 눈을 마주치면 자지러지게 웃는 그 아이를 보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키릴 문자로 된 책을 들고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 이국적으로 생겼지만 한국어로 대화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속으로 놀라기도 했다. 기내 잡지에 소개된 카자흐스탄 최초의 동화 작가인 Sapargali Begalin의 사진을 보니 괜히 한국 사람과 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심심해서 생존용으로 익힌 러시아어 읽기 연습이나 할 겸 기내에 적힌 주의사항을 읽어보기도 했다. 첫 줄에 적힌 문장에 배우지 않은 문자가 나와 흠칫했는데, 알고 보니 카자크 어였고, 둘째 줄에 적힌 것이 러시아어였다. 나중에 카자흐스탄 친구가 몇몇 더 생기며 들은 소식으로는 이후 문자 개혁을 해서 키릴 문자 대신 라틴문자를 쓰도록 바뀌었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 친구들은 SNS에 여전히 키릴 문자를 쓴다.
아스타나 공항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러시아 항공인 아에로플로트를 탔을 때도 그랬고, 얼마 전 네덜란드 항공사를 타고 스페인에 갔을 때도 손뼉 치는 사람을 보았다. 특정 문화권에서 흔한 것인지, 그냥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인지 잠시 궁금했다. 아스타나 공항에서는 경유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레이오버를 할 여유는 없다. 그래도 오면서 비행기에서 틀어준 아스타나 관광 홍보 영상 덕분인지 괜히 기대가 되며 몸이 들썩들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