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비트 Алфавит
2016년 여름의 기억. 말 그대로 지구 한 바퀴를 돌았던 여행.
서울 - 아스타나 -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 헬싱키 - 키토 - 바뇨스 - 오타발로 - 보고타 - 살렌토 - 카르타헤나 - 멕시코시티 - 레온 - 오아하카 - 서울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서는 매달 원하는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원하는 책을 받을 수 있었다. 항상 읽을 것을 찾아다니는 나는 물론 매번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고 나서는 바로 왕초보 러시아어 강의를 신청했다. 물론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고, 완전한 문맹이 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 알파비트만 익힌 채 출발했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Aeroexpress를 타고 벨로루스까야 역에서 조금 걸어 지하철 역으로 갔다. 같은 역이지만 공항철도와 지하철역이 조금 거리가 있었다. 오는 길은 물론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깊숙이 내려간 지하철 역에도 로마자는 볼 수 없었다. 키릴 문자를 읽을 수라도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순간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느 역에 있는지도 모를 뻔했다.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는 상황이 확실히 달랐다. 모스크바와 다르게 지하철 역 이름 정도는 로마자로도 함께 쓰여 있었고, 유럽 쪽에서 온 관광객들이 길거리에 가득해 영어가 쓰여있는 간판도 종종 보였다. 중국으로 치면 모스크바가 베이징이라면, 뻬쩨르는 상하이 같다.)
구글이 정복하지 못했다는 시장이 바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다. 각각 바이두, 네이버, 야후, 얀덱스 때문이라고. 러시아 도착 전 미리 얀덱스 어플을 다운받았다. 가장 유용하게 쓴 것은 지하철 노선도. 특히 같은 역이어도 호선에 따라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이 앱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스템은 몇 번 다니다 보니 몇 호선인지 헷갈릴 일이 없어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여행을 할 때에는 얀덱스 앱을 러시아어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여행 막바지에는 나름 편해져서 얀덱스로 택시를 불러 잡아 타기까지 했다.
러시아어를 제대로 공부해 본 것은 아니지만, 토종 한국인 입장에서 그 발음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 어려웠고, 문법은 말할 것도 없으며, 기본 단어나 인사말조차 쉬운 것이 하나 없었다. 그나마 다른 외국어와 비슷한 단어들만이 머릿속에 남았는데, 지금 생각나는 단어는 의자 (стул, stul)와 커피 (кофе, kofe).
모스크바에서는 한 도보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가이드를 키타이 고로드 역(Китай-Город,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이나 타운이라는 뜻이지만 차이나타운과 전혀 상관없는 곳.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근처의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 동상 앞에서 만났다. 이 둘이 러시아 교육의 아버지이자 이 키릴 문자를 만든 사람이라는 설명에 덧붙여 가이드는 "이제 저희 러시아 여행에서 누구를 탓해야 되는지 알겠지?"라며 농담을 했다. 뭐 그래도 바짝 배워서 읽을 수 있게라도 되는 게 어딘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객은 그들을 탓할 시간도 없었다네.
키릴 알파비트를 익힌 것이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내가 길거리 구경을 하면서 간판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내 눈에 보이는 문자들을 읽는 것을 즐겨한다. 안내판, 상점 간판, 메뉴판, 광고 전단지 등등 가리지 않는다. 러시아 여행을 하면서도 혼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것저것 읽어보았다. 그 작은 행동이 뭐라고. 괜히 마음이 편해지면서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와 있다는 생각이 조금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