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 덕분에 러시아 여행 참 잘했다

잡았다!

by mig

서울 - 아스타나 -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 헬싱키 - 키토 - 바뇨스 - 오타발로 - 보고타 - 살렌토 - 카르타헤나 - 멕시코시티 - 레온 - 오아하카 - 서울


이상하게 나는 승부욕이 없다. 가위바위보부터 친구들과의 내기, 시험 성적에 이르기까지 이기고 지는 것,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것, 1등을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이 때문에 집단에서 요구되는 특정 목표를 갖거나, 목표를 통한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신 종착점을 정해놓지 않고 차근차근해나가는 일에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승패가 정해져 있거나, 목표점이 있거나, 전략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게임에는 다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즐겁게 하는 게임은 혼자서, 시간제한이나 승패가 없이 단순하게 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중 최고는 원버튼 게임.


러시아 여행을 하던 2016년 여름은 전 세계적으로 '포켓몬 GO'가 화두일 때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더욱더 화제였는데, 게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켓몬을 잡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가 서울에서 속초로 달려가던 때, 포켓몬 부화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가 생겼던 때가 바로 2016년 여름이었다.


딱히 여행 중에 하려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나도 심심한 김에 게임을 다운받았다.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커피를 주문하러 들어간 카페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걷던 거리에서 포켓몬을 잡았다. 관광 명소로 소개된 곳들 근처에서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기에, 무계획에 길치인 나에게는 사실 포켓몬 GO가 가이드 역할을 했다. 모르고 지나칠법한 주변 건물이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동상 등이 지도에 표시되어 한 번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또, 공항을 포함한 중요한 장소들은 이 세계에서는 포켓몬 체육관이다. 한국어 이름밖에 몰랐던 포켓몬들의 영어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잡고 나서는 내가 친숙한 한국어 이름으로 저장해두었지.


물론 포켓몬만 잡으며 골목골목을 쏘다닌 것은 아니다. 우선 첫날 아침부터 콘데 나스트 사가 직접 운영하는 Vogue 카페에 방문했고, 당시 한창이던 도시 축제 장소를 둘러본 뒤 모스크바 출신 가이드 Irina가 진행한 도보 투어에 참가했다. 본인이 나고 자란 도시에 자부심이 가득한 가이드가 주요 장소들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물론, 현재 본인이나 젊은 러시아인들의 생각까지 알려줘서 재미가 두 배였다. 굼 백화점에서 러시아 심카드도 구입하고, 유명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담백한 것이 내 스타일!) 푸드 코트 개념인 백화점 내 스딸로바야에서 생전 처음 접하는 러시아 음식을 즐기기도 했다. 빅토르 최 추모 공원도, 아르바트 거리도 걸었고 그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하기도 (!) 크렘린 박물관에서도 익숙했던 서유럽식이 아닌, 조금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러시아 미술품과 만났다. 아스타나 공항에서 만난 한국 동생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처음 본 여행지에서의 감상을 모국어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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