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후 삼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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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뇨스에서 푹 쉬고 다시 키토. 주말에는 근교에 있는 오타발로 시장에 방문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북쪽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갔다. 마침 호스텔 스탭 루이스가 자기도 함께 가겠다며 동행했다.
키토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잡상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스페인어 발음이 깔끔한 편인 에콰도르에서 이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로 스페인어 청해 연습이 된다. 간단한 간식이나 과일을 팔기도 하고, 장난감을 팔기도 하는데 이날은 어떤 책을 파는 분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상인들 중 가장 잘 팔린 상품 같았다. 물건 파시는 분들이 내쪽으로 다가오면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이분은 이 책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하라는 말을 하며 손에 쥐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래도 안 샀지만.
터미널에서는 간식으로 엠빠나다를 챙겼다. 2.5달러 하는 시외버스 표를 사고, 영화를 틀어주는 버스 안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오타발로에 도착했다.
오타발로 시장은 규모도 규모지만, 원주민들의 수공예품을 저렴한 가격에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눈으로만 마음껏 구경하려 했지만, 멋진 색감과 독특한 모양에 반해 친구와 둘 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사고 있었다. 다음에는 꼭 큰 캐리어를 들고 와야 한다며...
점심으로는 무난하게 seco de pollo가 메인인 almuerzo (점심 세트)를 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대가족이 스페인어가 아닌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에콰도르 여행이 좋은 이유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전체적으로 '때 묻지 않은'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라마다 고유한 특색이 있어도, 보통 수도나 커다란 도시에 가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키토, 그중에서도 번화가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구시가지처럼 식민지 시절의 유럽풍 분위기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후에 간 보고타나 멕시코시티와도 아주 달랐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욱 남쪽, 페루와 볼리비아에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키토의 voto nacional에서 이미 알파카 숄을 하나 샀지만, 더욱 다양한 색과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오타발로에서도 몇 개 더 사고 말았다. 여력이 되었다면 왕창 사가서 선물로 돌리고 싶었다. 처음으로 배낭여행이라 아쉽다 생각했던 순간. 작은 파우치도, 기모 처리된 털모자도 샀고, 나중에 먹을 간식으로 블루베리도 샀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사 제낀 물건들은 모두 다 루이스의 가방 속으로! 역시 큰 오빠다(?!)
휴무일을 손님들과 함께 한 루이스는 자신도 마침 주말을 맞아 외출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오타발로 근처에 함께 가볼 만한 곳이 있다며 뻬구체 폭포 Cascade de Peguche로 향했다. 작은 시골마을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도착해보니 원주민들이 쓰던 해 달력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니, 과거형으로 말할 것도 아니었다.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축구를 하거나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 막연히 내가 생각했던 인디언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넓은 광대, 하나같이 머리를 길러 땋고 있는 아저씨들.
우리는 숲으로 들어가 산책을 시작했다. 식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딱 보았을 때 내 눈에 익숙지 않은 나무나 풀, 꽃이 보이면 내가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산림욕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Cascada, 폭포라고 쓰인 표지판을 따라 한 다리를 건너던 중 개 한 마리를 만났다. 우리를 앞질러서 가길래 그냥 자유롭게 지나가는 아이인가 보다 했는데, 여기저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보니 다시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아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해 다시 만나고 나니 우리와 조금 거리를 둔 채로 다시 앞서 가기 시작했는데, 목표점이었던 뻬구체 폭포에 도착하고 나니 그 개는 홀연히 사라졌다.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다니 아쉽기도 하고, 또 정말 우리를 안내해준 것이 아닌가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폭포 앞에서 바로 사진을 찍겠다며 엄청나게 미끄러운 바위를 사족보행으로 오른 것 역시 잊지 못할 경험이다. 사진은 결국 웃기게 나와버렸지만 그 덕분에 더 재미난 추억이 되었다. 이후 원주민들이 목욕도 하고 수영도 했다던 Piscina incaica에 도착해 오타발로 시장에서 사 온 블루베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본 사이지만 친구도 나도 루이스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에콰도르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 친구들과 함께 사는 '우리 집'에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