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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며칠 보냈다고 정이 들어버린 키토를 잠시 떠나 바뇨스로 향했다. 크고 무거운 짐들은 심지어 키토 집에다가 맡겨두었다. 정말 친구네 집 같았던 우리 키토 숙소. 가까운 Universidad central에서 북쪽 버스 터미널로 갔고, 도착해서는 바뇨스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버스를 잡아 타고 출발했다. 어떤 버스를 타게 될지는 복불복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탄 버스는 화장실도, 와이파이도 있고 영화도 틀어줬다.
키토에서 바뇨스로 가는 길은 커다란 화산 두 개 사이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키토가 있는 이곳은 바로 '불의 고리'. 활화산도 몇 개 있는 화산의 나라이다. 그냥 산이 아니라 화산을 보며 버스 여행을 하다니. 몇몇은 심지어 설산이다. 하루에 사계절 날씨를 다 경험할 수 있는 키토이긴 하지만, 새파란 하늘에 푸른 들판과 하얀 눈이 덮인 산이 함께 보이는 경치는 참 새롭다. 버스를 타고 한 숨 푹 자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경치 구경을 하느라 잠도 거의 안 잤다.
담벼락이 알록달록한 초등학교를 지나갈 때면 뜬금없게도 한국에서 만난 에콰도르 친구들이 떠올랐다. 이 파란 하늘 아래 에콰도르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중에 자기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길거리나 버스에서 만난 귀여운 에콰도르 아이들 중 누군가는 또 10년 후에 서울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온 사방이 깜깜해진 후에야 바뇨스에 도착했다. 우리는 키토에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숙소 예약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심가 같은 곳으로 가서 보이는 곳으로 직진했다. 유명 관광지라 숙소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금세 방을 잡을 수 있었다. 깜깜한 밤이어도 그냥 자기는 아쉬워 도시 구경을 조금 했는데, 각종 액티비티와 관광 상품을 홍보하는 가게들, 그리고 마사지 샵이 굉장히 많았다. 우리는 편히 쉬다 가자고 다짐하고, 근처 슈퍼에서 간식과 맥주를 사 와 숙소에서 친구와 함께 체 게바라의 일생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 마냥 꿈꾸던 남미 여행을 친구와 함께 오다니, 살짝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다음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깜깜할 때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높은 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침 비 덕분에 살짝 물안개까지 껴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장관이었다. 비가 오니 활동적인 관광 상품보다는 스파에 집중하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 미리 봐 둔 스파로 향했다.
종류도 많은 서비스 중 우리는 머드팩과 스팀 사우나, 그리고 발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멋진 계곡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서 따뜻한 허브티를 마시니 벌써부터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머드팩을 위해 안내받은 방에는 모니터 하나와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 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곧 우리에게 각 하나씩 따끈한 진흙 팩이 도착했다. 엄청나게 부드럽고 따뜻해서 몸에 바를 때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진흙을 싹싹 긁어모아 다 바르고 나면?
..?
이 진흙이 마르도록 전신을 열심히 흔들어 춤을 춰야 한단다. 참고용으로 줌바 댄스 같은 영상을 틀어주고 직원은 퇴장했다. 처음에 머드팩 코스를 설명해줄 때 춤을 춘다는 설명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농담인 줄 알고 넘겼었다. 그런데 정말로 30여 분 동안 빡세게 온몸을 흔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모두 흥겨운 라틴음악이긴 했지만 따라 하기 쉬운 춤은 절대 아니었다. 친구와 나는 이 상황이 그저 웃겨서 웃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췄다. 진흙은 말려야 하니까! 나중에 마른 진흙을 따뜻한 물로 씻어내니 피부가 보들보들해졌다. 피부도 좋아지고 운동도 하고 일석이조!
그다음은 이 스파에서 가장 유명한 스팀 사우나. 스페인어로는 "커다란 상자 안에서 하는 목욕"이라고 한다. 온몸이 다 들어가는 나무 상자 안에 앉아 목만 내놓고 사우나를 하는 방식이다. 상자 아래쪽에서 향기로운 허브향 스팀이 올라오는데, 안에 있는 손잡이로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 발 밑에 깔려 있는 잎사귀들에서 올라오는 향이 기분 좋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밖에서 보면 목에 칼 쓴 춘향이가 따로 없지만 기분만큼은 왕이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중간에 세 번 있는 찬물 타임. 중간중간 직원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데, 찬물 샤워 시간이 되면 거리를 두고 나에게 차가운 물을 쏜다. 그리고 점점 그 강도가 세져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발 마사지까지 마치고 나면 파인애플 반 통을 먹기 좋게 잘라 내어 준다. 이후에 다른 곳에 가서 따로 발 관리와 페디큐어도 받고 나니 전신이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그 후 우리는 바뇨스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최고의 음식 경험은 역시 시장이 아닌가. 그리고 역시 그 기대는 충족되었다. 바뇨스 시장에서 먹은 곱창 수프는 단연 최고였다. Almuerzo로 주문을 했기 때문에 수프와 밥, 반찬, 그리고 파인애플 코코넛 주스까지 풀코스로 먹었다. 이후 다른 시장에서는 엿을 만들고 계신 아저씨를 구경하다가 대화를 조금 나누고, 그러다가 엿을 얻어먹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돼지 껍데기 튀김도 궁금했지만, 왠지 아는 맛일 것 같아 대신 바나나맛과 치즈맛 엠빠나다를 사서 (1달러에 6개!) 키토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와 핀란드를 거쳐 키토에 이르는 지구 반 바퀴 비행과 아침부터 새벽까지(!) 가득 찼던 매일을 보내다가 이렇게 바뇨스에서 푹 쉬고 나니 정말 충전이 된 기분이었다. 비 오는 날씨 때문에 바뇨스에서 유명한 액티비티는 단 하나도 안 했는데, 언젠가 다시 와서 못다 한 것들, 못 가본 곳들을 다시 와볼 기회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