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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un 10. 2017

8. 아프니까 서핑이다

"세탁기 돌려 나왔습니다!"

8-1. 일주일 내내 발리에서 서핑을 했다. 처음 두 번 강습을 듣고, 혼자서 파도를 잡아타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다. 매일 밤 깁스를 한 것 마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스 투성이다. 매일 가는 쿠타지만, 매일 보는 파도는 너무나 낯설다. 대자연 앞에서 겸허해진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겸허해지지 않으면 저 바다가 나를 어떻게 잡아먹을지 그려지기 때문이다.

8-2. 혼자 타는 첫날, 바닷물이 무릎에 찰랑거리자,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전날의 기찬 파도와 달리, 온순하게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괜히 콧노래가 나온다. 역시 첫 테이크 오프가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해변가에 도착해 다시 서핑보드를 들고 파도 속으로 들어가기 여러 번, 하지만 바로 파도를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안장에 올라탄 듯, 보드 위에 앉아 저 멀리 바다를 읽어야 한다. 파도를 알아야 파도를 잡을 수 있다. 오늘도 채 1분도 안되는 시간을 위해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사람들은 서핑하면, 바다 위에 서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세상의 모든 멋있는 것들이 그러하듯 그건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8-3. 연달아 테이크오프에 성공하자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던지는 공마다 잘 긁히는 느낌이다.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한참 패들링 하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하나같이 수평선 끝을 바라보고, 동시에 보드를 돌려 패들링 하는 사람들. 나도 그들처럼 바다를 응시했다. 한참 그렇게 보면서 파도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되었다.

8-4. 첫째, 파도는 부서지며 새로운 파도를 만든다. 무수히 반복된 파괴와 재창조의 굴레 끝에 생겨난 파도가 바로 우리가 자주 보는 해안가의 거품 파도이다. 내가 기다리는 파도가 저 앞에서 부서진다면, 그로 인해 만들어질 새로운 파도를 기다리면 된다. 파도는 절대 한번 부서졌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8-5. 둘째, 파도가 혼자 깨끗하게 밀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파도 뒤에 파도가 바짝 붙어 연달아 몰려오며, 기본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추진력을 얻기도 하지만, 기본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파도 넘어 파도의 산에 부딪혀 고꾸라진다. 삶에서도 바다에서도 전화위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같다.

8-6. 마지막으로, 큰 파도가 다 좋은 파도는 아니다. 멋모르고 큰 파도 위에 올라탄 나는, 바로 통돌이를 당했다. 통돌이란, 파도 안에 들어가 드럼 세탁기 돌아가듯 온몸이 세차게 돌아가는 상황을 말한다. 온몸이 절임 당한 채, 간신히 바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선생님은 웃으며 내게 큰 파도가 다 좋은 파도는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체험한 거라고 말했다. 크기 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깨끗하게 잘 깨지느냐다. 겉에서 보기에 좋은 것과 실제로 좋은 건 이렇게나 다르다. 통돌이 이후로 왼쪽 목에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다.

8-7. 나는 바다를 바꿀 수 없다. 내가 잘해서 바다 위에 올라탄다는 생각은 건방지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바다가 잠시 나를 태워줬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미개한 존재는 아니다. 노력하면 무언가는 된다. 미친듯한 패들링으로 타기 힘든 파도 위에 올라탄 순간, 내가 바꿔야 할 대상은 바다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다.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 파도에 보드가 출렁거릴 때마다, 당장 일어서고 싶지만 기다리지 못하면 파도를 탈 수 없다. 타는 것만큼 중요한 게 기다리는 것이다.

8-8. 이 모든 경험은 수차례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와서 알게 된 것들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세탁기에 들어가야 할까. 발리 세탁기는 삼성, 엘지보다 꽤 아프다. 

정말 아프니까 서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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