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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an 29. 2016

이별과 여행 사이
이탈리아 01

서방 견문록

이탈리아에 무언가를 두고 오자 다짐했었다. 그 다짐은 여행의 이유이자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둥근 원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원 안에는 수년의 시간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미련이라고 이름 붙여져도 마땅한 기억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가운데 나는 가만히 서있었다. 



어쩌면 그 기억을 돌리는 중심축이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한국을 떠났다.


슬픔에 잠겨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가장 큰 슬픔을 찾아가기로 했다. 절망과 좌절, 환희와 기쁨, 그 모든 역설적인 감정의 교차점에 피렌체가 있었다. 피렌체의 두오모에 올라 나는 그를 떠올렸다. 아오이가 쥰세이의 목소리를 좋아했던 것만큼, 나는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었다. 어깨에 고개를 묻으면 언제나 달콤한 향이 났다. 그의 목덜미가 좋았다, 뒤에서 바라보면 곧게 뻗은 목에 솜털이 반짝거렸다. 그의 손도 좋았다. 못생긴 손이라며 뒤로 감추며 웃던 그를 여전히 기억한다. 



삶은 왜 이리도 얄궂은 걸까. 


그가 떠난 지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나는 아직도 너무 많은 그를, 그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를 놓아버려야 할 때, 나는 기억의 양 끝을 잡고 물을 짜듯 슬픔을 짜버려야 했다. 탁탁, 잘 펴서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바싹 말리자. 



이제는 그를 기억하지 않고, 추억하자고 수년째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토닥였다. 그 아이는 작은 주먹으로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어르고 달래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내면서 토닥였다. 그럴 때마다 더 큰 소리로 아이는 울었다. 마지막 손가락 하나, 남았을 때 나는 말했다. 


그의 옷자락. 고개를 들어 보렴.
그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
네가 잡고 있던 옷자락은 그저 찢어진 천 조각일 뿐이란다.
손을 계속 쥐고 있으면 다른 이가 내민 손을 잡을 수 없단다. 


주홍빛 지붕과 파란 하늘은 묘한 매력을 풍겼다. 손에 힘을 푼 지는 꽤 됐는데, 내 손아귀에 놓인 그의 옷자락이 날아가길. 저기 멀리 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부터 불어오는 이 바람이 너를 데리고 가길. 



말린다고 말려질 너였다면.


 대뜸 후회가 일었다. 물기가 뚝뚝 흐르는 걸 억지로 말리려고 하니, 아니 이미 내버려 두었다면 말랐을 옷자락을 꼭 쥐고 땀에 젖은 채로 그렇게. 동공마저 까맣게 그을린 것 같은 피렌체에서 나는 네 번째 손가락에 하얗게 남아있던 그 원을, 까맣게 태워버릴 결심을 하고 돌아간다. 쿠폴라와 꼭 닮은 그 원을 주홍빛 도시에 남겨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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