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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an 29. 2016

이별과 여행 사이
이탈리아 02

서방 견문록

연인들이 오기 좋은 도시, 베니스에 발을 디뎠다. 피렌체에서 베니스로 건너오는 길, 아직 울멍거리는 내 마음은 베니스의 굴곡진 길을 따라 울렁거렸다. 바포레토를 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떠돌이 나그네와 다른 점은 목적지가 있다는 것, 같은 점은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 



첫날은 리도섬에서 피로를 풀고, 오늘은 부라노섬에서 기억을 풀었다. 먹빛 기억이 강물과 닿자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부라노에 다 와가니 색색의 집이 우릴 반겼다. 빨강, 노랑, 초록, 주황. 안개가 자주 낀 베니스의 어부들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찾은 방법이란다. 내 마음의 강을 따라 세워진 색이 다른 집들을 떠올렸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되뇌고 되뇌었던 기억의 강이었다.


골목골목, 빛바랜 벽 위로 다양한 꽃이 우거졌다. 창문 아래로 떨어질 듯 흐드러진 꽃들이 머리 위에 대롱거렸다. 어디선가 나를 길을 잃어버렸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 같이 여행을 떠난 친구는 내게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부인할 수 없었다. 색깔 없는 길 위를 걷고 있는 나였다.



처음 사랑을 알았을 때 그것은 무지개색이었다. 


나의 바다 위에는 영롱한 색을 발하는 집이 있었고, 다른 어떤 집도 그 빛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게 홀수의 해가 지나갔다.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리 없다고 되뇌던 시간이 흘렀다. 내 바다에 태풍이 찾아왔다. 산호가 보이던 맑은 바다가 지나고 깊은 심연의 아득한 어둠이 내렸다.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 색은 칠흑 같았다. 얼마나 칠흑 같은지 모든 빛을 잔뜩 빨아들이는 그 모습에 나는 눈이 멀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튕겨져 나왔을 때 다짐했다. 다신 그 바다에, 그 집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지 않겠다고.


 내게 색을 알려주었던 당신이 떠나자 나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변했다. 그 강가에 돌아가면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타고 있던 배에서 던져져 파도 위에서 퉁 퉁 구르던 그 상처가 아직도 너무 아팠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질끈- 눈꺼풀을 내려버렸다. 



 바포레토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렸다. 날은 더웠고, 사람들은 많았다. 부라노섬에 발을 디뎠다. 제대로 가는 길이 맞긴 한 건지 눈앞에 색색의 집들은커녕 초록 잔디밭만이 펼쳐졌다. 


좁다던 그 섬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괜히 웃음이 났다. 내 마음 하나 갈피를 못 잡는다고 탓하던 스스로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마음 하나도 꽤나 큰 모양이라고, 그러니 언제든 길 잃어버려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한참을 걷다 걷다 현란한 색들이 치덕치덕 발라진 집들과 마주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언젠가 나도 내 바다의 집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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