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막 여행

이별과 여행 사이
이탈리아 02

서방 견문록

by 미뇽

연인들이 오기 좋은 도시, 베니스에 발을 디뎠다. 피렌체에서 베니스로 건너오는 길, 아직 울멍거리는 내 마음은 베니스의 굴곡진 길을 따라 울렁거렸다. 바포레토를 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떠돌이 나그네와 다른 점은 목적지가 있다는 것, 같은 점은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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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리도섬에서 피로를 풀고, 오늘은 부라노섬에서 기억을 풀었다. 먹빛 기억이 강물과 닿자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부라노에 다 와가니 색색의 집이 우릴 반겼다. 빨강, 노랑, 초록, 주황. 안개가 자주 낀 베니스의 어부들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찾은 방법이란다. 내 마음의 강을 따라 세워진 색이 다른 집들을 떠올렸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되뇌고 되뇌었던 기억의 강이었다.


골목골목, 빛바랜 벽 위로 다양한 꽃이 우거졌다. 창문 아래로 떨어질 듯 흐드러진 꽃들이 머리 위에 대롱거렸다. 어디선가 나를 길을 잃어버렸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 같이 여행을 떠난 친구는 내게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부인할 수 없었다. 색깔 없는 길 위를 걷고 있는 나였다.



처음 사랑을 알았을 때 그것은 무지개색이었다.


나의 바다 위에는 영롱한 색을 발하는 집이 있었고, 다른 어떤 집도 그 빛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게 홀수의 해가 지나갔다.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리 없다고 되뇌던 시간이 흘렀다. 내 바다에 태풍이 찾아왔다. 산호가 보이던 맑은 바다가 지나고 깊은 심연의 아득한 어둠이 내렸다.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 색은 칠흑 같았다. 얼마나 칠흑 같은지 모든 빛을 잔뜩 빨아들이는 그 모습에 나는 눈이 멀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튕겨져 나왔을 때 다짐했다. 다신 그 바다에, 그 집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지 않겠다고.


내게 색을 알려주었던 당신이 떠나자 나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변했다. 그 강가에 돌아가면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타고 있던 배에서 던져져 파도 위에서 퉁 퉁 구르던 그 상처가 아직도 너무 아팠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질끈- 눈꺼풀을 내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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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포레토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렸다. 날은 더웠고, 사람들은 많았다. 부라노섬에 발을 디뎠다. 제대로 가는 길이 맞긴 한 건지 눈앞에 색색의 집들은커녕 초록 잔디밭만이 펼쳐졌다.


좁다던 그 섬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괜히 웃음이 났다. 내 마음 하나 갈피를 못 잡는다고 탓하던 스스로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마음 하나도 꽤나 큰 모양이라고, 그러니 언제든 길 잃어버려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한참을 걷다 걷다 현란한 색들이 치덕치덕 발라진 집들과 마주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언젠가 나도 내 바다의 집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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