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견문록
폭풍의 언덕 같았던 이탈리아를 지나 발을 들인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빌라흐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취리히로 넘어올 때, 침대칸 너머로 초록 벌판 곳곳에 둥지를 튼 스위스 전통가옥 샬렛이 보였다.
아 스위스구나. 감동보다는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잘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먼저 마음을 두드렸다. 도시 냄새 물씬 나는 취리히를 스쳐 루체른에 도착했을 때, 카펠교에서 마주친 백조떼가 날개를 펴고 우릴 반겼다.
백조는 수면을 유유히 부유하면서 고개를 돌려 깃털 뒤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카펠교를 건너 루이 16세를 지킨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조각, 빈사의 사자상을 보고 고개를 숙인 후에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기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렇게 스위스의 도시 여럿을 거쳐 드디어 마주한 인터라켄. 브리엔츠 호수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에 가득 붙어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틈 사이로 나는 졸음에 겨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무거웠던 감정의 장화를 벗고 이제 알프스가 포근히 감싸 안은 그곳에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아주머니는 남들이 다 간다는 융프라우 대신 수영장을 가겠다는 결정에 후회할 것이라 공언했지만, 나는 버릇없는 코웃음을 쳤다.
모두가 봐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고, 읽어야 할 것을 읽으며 살아온 삶. 그것을 떠나온 지금 이 순간까지 모두의 바퀴 안에서 굴러가야 하는가, 묻고 싶지 않은 의문의 발로였다. 쉬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들어선 스위스. 그렇게 3일이 흘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고 싶은 일들로 점철된 하루는 얼마나 신났던가. 다람쥐 쳇바퀴 고교 생활을 끝내고 막 대학교 새내기가 되어 서울에 상경했을 때의 그 기분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단연코 튠 호수였다.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오늘은 걸어서 다녀온 그 호숫가. 사람 무서운지 모르고 먼저 날갯짓을 하는 오리들. 빙하를 닮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그 속에 나는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