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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Dec 21. 2017

세상에 완벽한 도전은 없다

실패가 보여도 도전하는 용기

*

지난 추석, 오랜만에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한남'이라는 단어가 화제에 올랐다. 한남이 뭐니? 아빠는 물었고, 나는 한국 남자의 준말이야,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그럼 나도 한남이네, 라며 껄껄 웃었다. 물론 그 이후에 한남이라는 단어엔 단순히 준말 이상의 사회적 혐오와 그 단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가끔씩 그때 아빠의 순박한 표정과 웃음소리가 기억날 때가 있다. 엊그제 만난 친구와 술 한 잔을 기울일 때도 그랬다. 


"나는 한남이란 단어도 싫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도 싫어. 물론 김치녀라는 말을 쓰는 사람도 싫고. 혐오는 혐오를 낳을 뿐이야. 왜 누군가를 혐오하며 살아야 해? 그 단어 때문에 한남이 아닌 사람들도 한남이 되어버리잖아. 난 그런 과격한 언어를 쓰는 게 싫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종류의 말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맞는 말이니까.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는 말을 부인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친구가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온실 속의 화초. 우물 안의 개구리. 항상 따뜻한 곳에만 살아서 세상 모든 곳이 다 따뜻한 줄 아는 너라서, 나라서. 그래서, 그동안 고개를 끄덕거린 게 아닐까. 멍청하게 순수해서, 정작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몰라도 되는 것도 모르며 살아온 것 아닐까.


*

대학생 때, 나는 엄마와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끽해야 명절이나 방학 때 시골집에서 얼굴을 확인하며 우리는 가족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근거를 서로에게서 얻어갔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런 엄마가 서울에 올라올 때가 있었다. 나를 보러 왔냐고? 뭐, 그것도 있지만 사실상 일타쌍피의 효과를 노린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노동조합의 시위에 참여하러 온 김에 나를 볼 계획이었으니까. 삼 남매를 키워야 하는 엄마는 매사에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고, 나는 별로 불만이 없었다. 


광화문 한복판, '연금개혁을 멈춰라'라고 써진 빨간 천을 앞뒤로 두른 사람들 사이에서, 펄럭이는 엄마 지부의 깃발을 찾아 마침내 이루어지는 모녀상봉이 재밌기도 했다. 엄마를 만나는 건 언제 어디서나 즐거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연인에게 같이 걸을까, 묻는다는 데 나는 행진하는 시위대 속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걸었다. 엄마의 옷에도 '연금개혁 전면 철회'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있었다. 


"연금개혁 전면 철회해야 한다고 생각해?"


마침 그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던 나는, 여러 조사 끝에 연금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강경한 입장을 취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운을 뗐다. 그때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지금 연금제도, 바꿔야 할 게 많아. 그런데 정부가 바꾸려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고,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래. 누구에게나 시간은 필요하잖니. 정부에게 한 발만 물러서라는 거지"


"그런데 왜 다 없던 일로 하라고 해?"

"밀당이지, 밀당.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사실상 노동자는 어찌어찌하여도 약자야. 세상에 고용주보다 강한 노동자가 어딨니. 아무리 노동자가 소리쳐도 고용주 결정이 우선이지. 1을 바꿔달라고 했을 때 0.5라도 들어주면 참 좋을 텐데, 이 세상은 1000을 말하면 1을 들어줄까 말까니까."


청계천 다리 위에서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나는 멍해졌다. 어떻게 말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를 캐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

사람들은 완벽주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완벽주의는 병리학적인 증상으로 분류한다. Burns(1980)는 완벽주의자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을 달성하도록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밀어붙이며, 자신의 가치를 전적으로 생산성과 성취에 기반하여 평가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Horney(1950)는 완벽주의를 'the tyranny of the shoulds(당위성의 폭정)', Hollender(1965)는 '상황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높은 수준의 수행을 자신이나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결국 사람은 외부 평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세상은 결코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내고 싶다고 해서 완벽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도 완벽하지 않으므로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다.


*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고,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는 생각엔 동의해?"


그러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가 맞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보자. 성별을 떠나서 생각하는 거야.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배경이 달라서 좋은 교육과 좋은 부모님 등 많은 좋은 것들을 누려온 사람 A가 있어. 그리고 태어나서부터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온 사람 B가 있고. B가 자기가 느끼는 불합리한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A가 느끼기엔 그 표현방식이 교양이 없는 거야. 과격하고, 예의에도 어긋나고, 반례가 있으니까 사실도 아니야. 그럼 A는 그 사람의 표현방식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귀담아듣지 말아야 할까?"


친구는 오른손으론 자신의 턱을 만지고 왼손으론 오른손 팔꿈치를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할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다.


"의미를 들어야겠지."

"맞아. 나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예전엔 그런 생각 1도 못했거든. 근데 사실 표현방식을 무시하고 의미를 캐치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있잖아. 심지어 그 의미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맞아떨어진다면 더더욱."

"그럼 넌 한남 같은 언어가 존재해도 괜찮다는 거야?"

"아니. 한남도 싫고, 김치녀도 싫다니까. 그런데 지금 나한테 그 말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

완벽주의를 배우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로 진단했다. 완벽한 도전이 아니면 도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도전 따윈 없고, 완벽한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완전한 삶 같은 것도 없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사람.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밤, 독립언론을 꾸려 어설프던, 서툴던, 불완전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다른 친구가 떠올랐다. 그렇게 완전, 완성, 완벽을 향해 다가가는 것. 이제껏 내가 무서워 못하고 있던 일을 하고 있던 그녀가 부러워졌다.


*

"그리고 나는 이제 불완전한 세계를 바꾸기 위한 불완전한 도전들이, 미완성된 도전자들이 조금 멋지다고도 생각해. "


과격한 언어가 싫다는 친구와 헤어지기 직전, 나는 말했다. 그리고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때의 생각과 이때의 대화를 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 글이지만,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수천수만 번 욕을 먹는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도전해야겠다고. 미완성된 도전자의 대열에 합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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