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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an 03. 2018

탈색

알맹이는 텅텅 비어도, 겉치레는 하는 게 인간이나 보다.

*
이상한 일이지. 얘네랑 같은 나이대인데, 신입들에겐 초롱초롱한 눈빛이 없어. 표백제에 쑥 집어넣었다 꺼낸 것처럼 눈깔이 동태 눈깔이야. 

 풋, 실소가 나와버렸다. 아유 이놈의 입, 오두방정이야. 속으로만 비웃는다고 한 걸, 꼭 밖으로 꺼내버린단 말이야. 10대 대기업의 인재상에 항상 창의란 말이 빠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한 말이야. 떨어진 낱알을 주워 먹는 참새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짹짹 되는 인턴들을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빛이라거나, 자신 있게 자기 말을 하는 기백이라거나 뭐 그딴 걸 가지고 있으면 여기 들어올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있던 사람들도 다 표백제에 퐁당퐁당 빠트려서 내밀 손도, 말할 입도, 결국에 생각할 뇌까지 없애버리잖아요.

단맛이 다 빠져 고무 같아져버린 껌을 뱉듯, 퉤, 단어를 뱉었다. 

*

주장이나 의견 같은 게 사라지고, 확신이나 신념 같은 게 흔들리는 게 늙는 거라면, 이미 폭삭 늙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얗게 변해버린 백발을 흔들며 얼어버린 귀를 감쌌다. 모든 늙은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만 회사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 늙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마음이 헛헛해지고, 생각을 그만하게 되는 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만큼 산다는 건 녹록지 않다.

*
까만 머리엔 기본적으로 빨간색이 베이스가 되고, 빨간색을 제외한 색깔로 머리 색을 바꾸려면 탈색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빨간 물을 빼야 한다. 1번 하면 주황색이 되고, 3번 하면 노란색이 되고, 5번 정도 하면 백금색이 된다. 하면 할수록 하얘지고, 두피는 타들어가고, 머리카락은 얇아진다. 마침내 색깔이란 게 없어진다.

*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이 될까 봐 두려운 와중에도 머리색을 두 번이나 바꿨다. 초록과 파랑이다가 회색과 보라색이다가. 알맹이는 텅텅 비어도, 겉치레는 하는 게 인간이나 보다. 

*
한번 더 탈색할까? 색을 제대로 내려면 한 번 더 빼야겠는데. 미용사 언니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색이 선명하게 나오려면, 한 번 더 빼야 하긴 하지. 그래 이렇게 탈색만 하다 2017년이 다 간 건가 보다. 어떤 색이 물들지 무섭고, 잘못된 색이 나오면 되돌리기 힘들어 두렵지만, 엄마 말대로 난 얼굴이 하얘서 뭐든 잘 어울리니까. 한 번 해보자. 색을 입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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