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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Mar 25. 2018

빚나는 발리여행 2 끝

그땐 좋았고, 다녀온 직후엔 싫었고, 시간이 지나니 추억으로

발리에선 정말 생각 없이 놀았다. 매일 한국에선, 오늘은 뭐하지, 내일은 뭐하지, 이번 주는, 다음 달은, 내년은, 하며 허덕거렸다. 삶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 흘러가는 느낌. 단계별 공정이 정해져 있고, 규격에 맞지 않으면 불량품이 될 것 같은 기분. 그 모든 걸 처음으로 다 버렸던 곳이 발리였다. 빚나는 발리 여행 당시엔, 숨이 멎을 정도로 좋았다. 이대로 숨이 멎어도, 이런 삶을 살다가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생의 다른 길을 생각해본 순간이었다. 차선이 아닌 최선이 삶. 내게 발리는 그런 공간이었다.


발리가 가고 내게 남은 건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까맣게 타버린 피부, 그리고 빚.


발리에 다녀온 직후, 삶은 다시 현실로 나를 옭아맸다. 그 이름은 빚이었고, 그건 내게 삶과 맺은 노예계약 같은 것이었다. 생각이 없었던 만큼 더 많은 생각이 몰려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옆에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할까의 고민이 따라다녔다. 처음 져본 빚이라는 무게가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숨을 멈추는 건 더욱 싫었다. 


돈을 벌 땐 한없이 작은 150만 원이, 돈을 벌지 않으니 가슴 위에서 잠든 고양이처럼 무거웠다. 잠드는 순간까지, 아니 잠들고 나서도 외면할 수 없는 묵직한 무게. 그때의 나는 빚나는 여행 따위 절대 빛날 수가 없다며, 수도 없이 그 여행을 계획한 과거의 나를 탓했다. 행복했던 기억만큼, 더욱 고통스러웠다. 기억을 추억하면서 행복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꼬박 거의 1년을, 빚과 함께 지냈다. 아무리 작은 빚이라도, 어떤 길을 선택하는 데 거대한 걸림돌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맡지 않았을 일들을 시작해보고, 또 후회하고, 원래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과 부대끼고, 또 후회하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빚의 무게는 점점 줄었다. 



사람이 참 간사해서, 줄어든 빚의 무게만큼 발리의 추억이 자리 잡았다. 일어날 때가 없고 잠들 때가 없어졌던 그때를. 점심시간, 저녁시간이 사라졌던 그때를. 그저 눈이 뜨이면 일어났고, 눈이 감기면 잤던, 배가 고프면 먹었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았던 발리를. 이상하게 그 모든 제약이 다 사라진 발리에서의 삶은 한국보다 더 건강했다며, 그리고 그런 삶을 빚을 내서라도 경험해본 건 참 잘한 일이라고 과거의 나를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빚나는 발리 여행을 다녀온 후, 빚을 갚는 1년 여 동안, 나는 입을 여는 법과 동시에 닫는 법을 배웠다. 남들보다 조금 더 길게, 더 깊게 있어본 경험 덕분에 정보를 나눌 수 있었다. 블로그에서 스쿠터나 공항 와이파이, 우버 등을 묻는 사람들에게 답할 때만 입을 벌렸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닫았다. 내가 했으니 너도 하라는 이상한 역지사지는 물론, 사서  고생, 이란 무책임한 말을 내뱉지 않는다. 반대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가능성을 닫는 허무한 벽을 입으로 세우지도 않는다. 빚나는 발리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앎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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